2020년 10월 2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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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문화기획] 고택서 듣는 인문학 강좌

황량한 고택에 인문학 채우다
100회 향해 가는 고택서 듣는 인문학 강좌

  • 기사입력 : 2020-02-18 21: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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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부터 매달 한 통씩, 신문사로 꼬박꼬박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모르는 이였다. 내용인즉슨, ‘파랗게날이라는 인문학 연구소가 있는데, 매달 마지막 토요일마다 거창 부근 고택에서 인문학 강좌를 연다’는 것. 그렇겠거니 했다. 아니, 그러다 말겠거니 했다.

    열풍이라 할 만큼 너도나도 인문학 한다고 구청이며 도서관이며 쫓아다니던 때였다. 8년이 지났다. 이메일은 여전히 오고 있다.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예의 인문학 강좌는 어느덧 100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택의 본모습을 살리고 싶다이름하여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 이 강좌를 열고, 연구공간을 만들어 이끌어 오고 있는 사람은 이이화씨다. 그는 ‘연구공간 파랗게날’을 설립해 대표연구원을 맡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인 특정 공간만을 일컫지 않는다.

    이이화 씨
    이이화 씨

    거창 웅양면 동호리가 본가인 이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역사 관련 시민단체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늘 귀향을 꿈꿨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서당이며 누각이며 고택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사람들이 글 읽고 정담을 나누던 곳인데, 본모습이 사라졌잖아요. 글향기로, 사람의 온기로 이러한 모습을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2009년 대학강사로 일하던 아내를 설득해 두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2년 초, 연안 이씨들의 집성촌인 동호리 동호서당에서 첫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이후 매달 마지막 토요일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 일대 고택을 두루 찾아가 문학, 역사, 예술, 철학, 종교 등 다채로운 분야의 강좌를 마련해왔다. 즉, ‘파랗게날’의 연구공간은 바로 이 아름다운 고택들이다.

    이장무 ‘벽을 넘는다’ 강좌.
    이장무 ‘벽을 넘는다’ 강좌.
    김형국, 성유보 선생의 ‘진정한 관용 진정한 말2’ 대담.
    김형국, 성유보 선생의 ‘진정한 관용 진정한 말2’ 대담.

    △차별화된 인문학 강좌

    인문학 강좌는 이미 차고 넘친다는 기자의 반문에,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가 여타 강좌와 다른 점이 있다고 이 대표는 강조한다. 바로 누정(樓亭)문화. “동국여지승람에 함양, 담양, 거창 등지에 누정문화가 발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누각이나 정자에서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하며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는 문화죠.”

    고택도 늘 같은 고택이 아니다. 동호서당, 관수루, 심소정, 벽송사, 거창항교, 포충사 자전루, 침류정, 원학고가 등 매번 다른 고택에서 다른 강연자를 모셨다. 기본적으로 한 번 초대한 강연자는 다시 모시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총 3시간 강연 시간 중 앞선 90분은 강의, 나머지는 90분은 토론으로 꾸며진다는 점도 특이하다.

    “강연자나 강연을 듣는 사람이나 사실 눈높이는 같습니다. 누구나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고,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교환하고 인정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리’ 강좌.
    ‘빛과 소리’ 강좌.
    이만열 선생의 ‘우리역사 5000년’ 강좌.
    이만열 선생의 ‘우리역사 5000년’ 강좌.

    △석학들의 열띤 강연

    이 씨는 매년 1년 계획을 세워 매달 주제에 적합한 전문가를 찾는다. 실제로 지난 8년간 국내의 내로라하는 석학과 전문가들이 거창을 방문했다. 숨겨둔 인맥이나 섭외처가 따로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개인적으로 연락을 한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전문가를 찾고, 직접 연락을 해서 초빙합니다. 의외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학자적 반열에 오른 분들은 자신의 강연을 듣고자 하는 청중이 한 명이더라도 벽촌까지 오는 것을 꺼리지 않아요.”

    강좌의 내용뿐 아니라 태도도 남다르다. “매번 사정이 좋을 순 없어요. 날씨가 험하다거나 메르스나 코로나 같은 질병이 만연할 때는 강연 들으러 오는 분들이 적을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강연자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 한 명이 오더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강의해요. 전력질주한다는 느낌입니다.”

    △인문학적 사유에 대한 갈증

    이러한 열정에 힘입어서일까. 강좌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파랗게날’을 찾아든다. 이 씨는 인터넷 블로그와 신문, SNS 등에 강좌 일정을 올리고 이들을 기다린다. 매번 얼마나 올지는 알 수 없다. 대략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150명 사이를 오간다.

    “전국 각지에서 옵니다. 지역도 다양하지만 성별이나 나이, 하는 일도 천차만별이라 그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긴 어려워요. 다만 인문학적 사유에 대한 갈증이 있는 분들이 아닐까 짐작해요.”

    강연료는 받지 않는다. 모두 무료강좌로 운영되며, 다만 강좌를 듣고 희망에 따라 ‘파랗게날’ 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들은 월 1만원씩 후원금을 낸다. ‘파랗게날’은 후원금으로 소식지와 강의록을 만들어 발송한다. 강좌를 들으러 오지 못하는 달에도 회원들은 소식지로 강좌를 확인할 수 있다.


    △특색 있는 강좌들

    그저 앉아서 듣고 토론하는 강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계절에 맞게, ‘파랗게날’은 특색 있는 강좌를 마련해두었다.

    먼저 4월에는 ‘학술토론회’를 연다. 다소 심도 있는 학술적 주제로 논객들이 토론을 한다. 2012년 ‘18세기 영남의 정치세력과 평영남비’라는 주제로 최윤오 연세대 사학과장, 정호훈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등이 토론을 벌인 이후 매년 다양한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꾸몄다. 8월에는 ‘대화’의 장을 연다. 특정 주제에 대해 대척점에 서있는 논객들을 모시고 ‘진짜’ 대화를 해보자는 취지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빨치산 출신 송송학, 임방규 선생과 토벌대 출신의 임명근, 김기태 선생을 모시고 한국 근현대사에 아로새겨진 좌우의 깊은 갈등과 오해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누고 화해하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9월은 ‘원로에게 듣는 역사 이야기’로 꾸며진다. 2013년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초빙해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한 이후 매해 9월이면 근현대사, 분단사, 선사문화 등에 대해 원로 역사학자들의 혜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을이 깊어지는10월에는 ‘빛과 소리’ 꼭지가 마련된다. 영상, 소리로 인문학적 시야를 넓힌다는 취지로, 임흥순, 정지영, 최승호, 이명세, 김재수, 이상우 감독의 강연이 있었다.

    일정 공간을 벗어난 활동도 있다. 춘분이 있는 3월, 하지가 있는 6월, 추분이 있는 9월, 동지가 있는 12월 둘째 토요일마다 주변 자연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도 떠난다.

    윤천근, 정호훈, 정우락, 김낙진 선생이 ‘남명과 퇴계 만나다’를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
    윤천근, 정호훈, 정우락, 김낙진 선생이 ‘남명과 퇴계 만나다’를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
    18세기 영남 정치세력과 평영남비 학술토론회.
    18세기 영남 정치세력과 평영남비 학술토론회.

    △100회를 맞이하다

    2012년 1월 이후 단 한 번도 쉬지 않은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는 어느덧 100회를 맞이한다. 오는 4월 25일, 도법 스님(실상사 회주), 방인성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 대표), 이주화 이맘(한국이슬람 사무처장), 함세웅 신부(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주요 종단을 대표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100회 강좌 ‘다시, 지금 여기 정의로운 생명평화’로 꾸며진다.

    100회를 넘어 200회, 300회까지 꾸준한 강좌개설을 위해 이 대표는 사과농사를 시작했다. 100여명 되는 회원들의 후원금만으로 강좌를 꾸리기가 늘 빠듯하기 때문. “최대한 농약을 치지 않고 친환경적인 사과농사를 짓고 있어요. 재정적으로 안정된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다양한 강좌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가 가진 궁극적 지향점은 ‘인문학의 생활화’인 듯 보인다.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학문이잖아요. 농사를 짓든, 사업을 하든, 학업을 하든,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열망들이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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