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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어느 이른 봄 밤, 스쳐간 시간- 장수용(경남사회복지관협회장)

  • 기사입력 : 2020-02-18 20: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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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이 가기 싫은지 막바지 꽃샘추위에 옷깃을 여민다. 그러나 봄의 전령 매화꽃 향기가 차가움을 몰아내고, 바람의 따스함을 타고 이미 오고 있다. 이맘때 즈음이면 떠오르는 사연이 있다. 바로, 자원봉사자 경자(가명)씨의 이야기이다.

    때는 거슬러 2002년, 20대 경자씨는 허름한 골목 주택가, 홀로 사시는 할머니를 한 달에 두 번 방문해 말벗이 되어드리는 봉사를 했다.

    연로하신 할머니는 단칸방에 사셨고,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어려워, 그저 누군가가 찾아와 말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이 오면 밥을 전기밥솥에 넣고, 그것을 두세 번 나누어 드시며 하루하루를 사셨다.

    어느 날 경자씨는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방문했다. 출입문 입식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어서 방에 들어오라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경자씨는 신발을 벗고 둥근 철판 상을 들고 방에 들어서며, “할매, 할매 오늘 생신이잖아요? 오늘은 미역국이며, 조기며, 맛있는 저녁 드세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펑펑 우셨다.

    “생일상 받아본 지 오래 됐다. 내 나이 아흔둘, 내 아들도 70이 다 돼 간다. 늙은 내 아들도 그 아들, 내 손자한테 얹혀살아서 나까지 그럴 수가 없어 이리 혼자 산다. 남편도 어린 아들 하나 두고 먼저 가버리고, 아직도 목숨 살아있는 기 괜히 여러 사람한테 폐만 끼치는 것 같다.” 고맙다, 고맙다. 경자씨 손을 잡고 놓지 않는 할머니를, 어서 드시라며 숟가락 건네주던 그날을 여태 경자씨는 잊지 못한다 했다.

    할머니는 아흔여덟의 나이로 떠나셨지만, 경자씨 마음에 그날 저녁 봄바람만은 남아 있다 한다.

    경자씨가 느낀 따스한 바람이 나에게도 기다려지는 2월의 밤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음과 가슴이 따뜻한 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사회는 돌아가는 모양이다. 삶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뚜벅뚜벅 말없이 봉사하는 걸음걸음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한 발자국인 것이다.

    장수용(경남사회복지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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