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2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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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수조 안에 갇힌 사람들- 조은길(시인)

  • 기사입력 : 2020-02-13 20: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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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 청소를 하다 어린 거미 한 마리를 만났다. 무심코 청소기를 들이대려다 백석(白石)의 시 “수라(修羅)”의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구절이 떠올라, 시 속의 화자처럼 가족들과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아라 속말하며 화장지로 살그머니 싸서 뜰에 놓아준다.

    그렇게 하고 나니 내 힘으로 거미를 불행에서 구해준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생겼는데, 뜰 구석구석 쳐놓은 거미줄에 속을 다 파 먹히고 껍질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곤충들이 떠올라, 거미를 살려 보내준 것이 거미의 피식자들에게 가족을 잃게 하는 불행을 조장한 것 같아 뿌듯했던 마음이 죄책감 같은 것으로 바꿔버렸다. 쾌적한 삶을 위해 집안으로 침입한 벌레는 무조건 죽여 없애는 것이 옳은지, 먹고 먹히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도록 제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이 옳은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이 시구가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이상 나는 거미의 편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서구 합리주의와 손잡은 기계문명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시의 화자가 거미에게 한 것처럼, 아궁이에 첫 불을 들일 때는 밤사이 아궁이 속에 들었던 미물이 있으면 도망가라고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툭툭 쳐주고, 수채 구멍에 뜨거운 물을 버릴 때는 그 속의 미물들이 몰살하지 않도록 식혀서 버리고, 열매를 거둬들일 때도 날짐승들의 몫으로 몇 개 남겨두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이런 행위가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당시 한 톨의 곡식이 아쉬운 배고픔에 쫒기면서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생물을 부릴 수는 있어도 어느 것 하나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공생공존의 도리를 지켰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사려 깊고 선한 손은 만물의 영장의 손으로 변신하여 대량생산을 위해 채소나 가축들을 공장식 사육장에 가두기 바쁘고, 그렇게 재배되고 사육된 먹을거리로 배를 불리고 부를 축적하는 시스템은 이 땅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것이 잘 먹고 몸 편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선택한 운명적 환경이라고 합리화한다 치더라도, 커다란 콘크리트 수조를 만들어 그 안에다 양식한 물고기를 잔뜩 풀어놓으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그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느라 물속을 버둥거리는 사람들, 그렇게 잡은 물고기를 즉석에서 회를 떠주고 구워주는 사람들, 그게 돈이 되는지 그 비슷한 놀이 시스템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을 보면 콘크리트 수조에 갇혀 버둥거리는 것이 물고기뿐만 아니라, 이익에 눈이 멀어 미물들을 쾌락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 나라의 인권 수준과 도덕성은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알 수 있다(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이 비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지방자치 단체가 지역특성화 명목으로 장려하고 관리하고 있다니, 이제 집안에 들어온 거미를 죽일까 살려 보내줄까 갈등하는 사람은 소심한 현실 부적응자이거나 이미 죽은 시인의 시 속에 박제돼버렸는지 모른다.

    요즘 창궐하는 신종 전염병을 피하느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병은 인간의 오만을 다스리기 위해 있다”는 말이 큰 재앙의 예고처럼 실감난다.

    조은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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