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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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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릴- 이주언

  • 기사입력 : 2020-01-02 07: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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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아침 그릴은 바쁘다 고구마 토마토를 구우며 기억

    이 모호한 새벽꿈을 그릴, 창에 서성이던 햇빛 오려 식탁에

    차린 조각 빛을 그릴, 오래된 도자기 속 음식이 육즙의 무

    늬와 진한 냄새로 배어들며 그릴, 그걸 바라보며 침을 삼켰

    을 중생들의 목구멍 그릴, 꼬챙이에 꿰인 채 환하게 돌아가

    는 통닭처럼 몸피들은 점점 오그라들고, 살았으면 더 오그

    라들었을 엄마의 표정도 그릴, 눈을 감아야 보이는 떠난 사

    랑도 그릴, 나의 아침 그릴은 바쁘다 그릴은 소리의 파동에

    도 있다 달팽이관 울리며 그릴, 마주 앉아 음악을 듣던 기

    분과 주전자에 끓어오르던 수증기와 밟히던 잎사귀의 소리

    까지 그릴, 자동차에 치인 고양이의 비명과 쓰레기통에 함

    께 버려진 열쇠의 짤랑거림을 그릴, 자물쇠 열고 들어가지

    못했던 그의 심장과 내가 거처했던 수많은 탄식을 그릴, 내

    영혼의 먹이를 요리하느라 분주한 나의 아침 그릴


    ☞ 얽힘과 설킴의 지난(至難)한 삶을 애써 태연한 척, 바쁜 척 혹은 무심한 척 넘기며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나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못해 영혼이 없는 듯하다.

    이런 날들의 연속선상에서 아침을 맞이한 시인은 음식을 굽거나, 데우는 역할을 하는 그릴(grill) 앞에서 이제는 모호해진 꿈과 모질게 살아왔던 그동안의 이야기들과 돌아갈 수 없는 추억들을 그린다.

    그리고 달팽이관을 통해 기억의 끄트머리까지 가닿은 시인은 탄식했던 한때의 기쁨과 분노, 아픔과 절망까지 끄집어내어 그릴 위에 내려놓고는 마침내 가여웠던 영혼을 위한 먹이를 요리하며 자신을 위안한다.

    다사다난했던 기해년(己亥年)이 해넘이를 하고 경자년(庚子年)이 밝았다. 새해에는 모두가 아름답고 경건한 영혼의 먹이를 준비하고 길을 나섰으면 한다. 강신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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