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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창동 지키는 아지매 김경년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 해설사팀장

동네 골목 가꾸며 희망 꽃피우는 창동아지매
마산 토박이 ‘나의 삶, 나의 마산’
가난했던 유년, 육아·살림 억척이로 지낸 20~30대

  • 기사입력 : 2019-11-28 20: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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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봐봐예. 골목골목 환한 꽃이 폈잖아요. 얼마나 예뻐요.” 마산 창동 골목길로 함께 거니는 그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쇠퇴한 동네의 어두캄캄해진 골목으로 벗겨진 벽을 새로 칠하고 그림을 그리고, 꽃을 심으며 정성스레 가꾸어 지금은 다시 빛을 보게 했으니 그 얼마나 기쁠까.

    창동의 대표적인 마을활동가로 주목을 받아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의 해설사팀장을 맡고 있는 김경년(57)씨의 이야기다. 그는 평소 이곳에 있으며 방문객을 맞이하고, 마산 토박이로 산 인생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전한다.

    창동의 대표적인 마을활동가이자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의 해설사팀장인 김경년씨가 창동예술촌에 점포를 얻어 마련한 ‘창동희망나무’에서 지역 출신 박상근 작가가 본인을 그려준 벽화 앞에 앉아 그림 포즈를 따라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창동의 대표적인 마을활동가이자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의 해설사팀장인 김경년씨가 창동예술촌에 점포를 얻어 마련한 ‘창동희망나무’에서 지역 출신 박상근 작가가 본인을 그려준 벽화 앞에 앉아 그림 포즈를 따라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이 자리에 민주화의 열기가 넘쳐났던 그때의 역사와, 1970~80년대 경남 제일의 상권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쇠락의 길을 걷던 시기와 2010년 도시재생이란 것을 통해 다시 번영의 길을 걷기까지 자신만의 특출한 입담으로 녹여낸다.

    그는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창동을 찾았을 때도 문화관광해설사로 창동 골목골목을 안내했었다. 그와 대통령이 함께 골목을 나란히 걸으며 활짝 웃는 모습이 지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비단 대통령뿐이랴. 누구든 그와 함께 골목길을 거닐 수 있어 즐겁다.

    11월 하순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예술촌 골목에서 그를 만났다. 아울러 함께 골목골목을 거닐다 그의 아지트로 이끌렸다. 김 씨는 평소 센터에서 방문객을 맞지만, 그 뒷골목에 사람들과 언제든 더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사비를 들여 자신의 공간인 ‘창동희망나무’란 곳을 마련해두고 있다. 이 안은 주변 상인과 예술촌 작가 작품 등 그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의 기증품들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에서 김 씨가 마산에서 나고 자라 마을활동가가 되기까지의 지난날과 앞으로 창동에서 그려갈 이야기를 들었다.

    김씨가 ‘3·15 희망나무’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김경년씨가 ‘3·15 희망나무’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가난했던 유년기

    김 씨는 “마산 추산동 한 언덕 슬레이트집에서 컸다”며 유년기를 회상했다. 아버지는 집 근처 창동의 부림시장 지하에서 리어카를 끄는 일을 하면서 생선 경매를 받아 배달을 주로 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리어카를 밀어주고 빈 리어카를 탔던 것들이 있다. 아버지는 가난과 고단한 일을 술로 달래어 본인과 가족을 힘들게 하는 일이 잦았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이 아주 불운하지만 않았다고 말을 했다.

    “집이 언덕에 있으니까 가만히 앉아 뒷골목에서 울다 보면 멀리 보이는 마산 앞바다가 너무 좋았죠. 밤이 되면 달빛 아래 배가 지나가가기도 하고, 아침이 되면 ‘붕~’ 뱃고동 소리도 들리고, 어리고 가난했을 때 뭘 몰랐어도 그때가 참 좋았다 싶어요.”

    가난은 소녀의 꿈을 꾸는 데 발목을 잡았다. 그는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집에선 하루빨리 취직해 집안의 생계를 돕기를 원했다.

    “엄마가 돈 벌어오라 했거든요.” 그는 당시 성호국민학교와 제일여중을 거쳐 부모님 뜻대로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를 나온 뒤론 곧장 양덕동에 LG그룹의 과거 사명인 럭키금성그룹의 영업소로 들어가 판촉사원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몇 년 일하다가 주변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신혼집은 양덕동 덕재굴다리 주택 방 한 칸에 제대로 된 살림살이 하나 없이 시작을 했고, 스물다섯에 첫애를 낳고 스물일곱에 둘째를 낳았다. 그에게 20대와 30대는 악착같이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일으킨 시간이었다. 김 씨는 “딸이 내 등에 업혀 고생을 많이 했다. 아이들 키우면서 쉬지 않고 일을 계속했고 방 한 칸짜리 여덟 번 옮겨 다닌 뒤로 겨우 조그마한 내 집을 장만했다. 그제야 인생에서 숨을 한 번 돌렸다”고 했다.

    김씨가 ‘3·15 희망나무’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김경년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 해설사팀장.

    ◇창동에서의 인생

    김 씨는 서른 초반 마산YMCA에 들어 주부생활운동 등에 참여하게 된다. 소비자운동과 지역 시민운동 등으로 활동을 키워갔다. 나아가 2007년 마흔다섯에 창동 상인회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제2의 인생에 큰 계기가 됐다. 그는 창동에 있는 동생의 가방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다 가게가 문을 닫게 되면서, 주변 상인 추천으로 창동통합상가상인회에 간사로 들어가 일을 했다.

    창동 상권이 마산 경제 침체로 가라앉기 시작할 때라 동생의 가게도 이를 피하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이고, 그가 들어간 상인회는 상인들이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 것에서 당시 창동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홈페이지에 오래된 가게를 소개하는 일을 했다. 이어 정부사업과 창원시의 전통시장활성화 지원사업을 따내기 위한 실무를 맡게 되면서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사업추진 동의 등 설득을 하는 일에 나섰다.

    그는 “이때 창동은 사람들이 죽어도 상권이 안 망할 것이라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가게들이 급속도로 문을 닫을 때였다”며 “이런 분위기에 상인들도 새로운 것을 해보자고 하면 ‘시끄럽다. 나가라’, ‘무슨 소용이 있겠노’ 하며 안 반겼다”고 말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창동에서 아케이드 공사와 공영주차장 조성 공사 등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창동은 2011년 정부 도시재생 R&D 테스트베드의 시범 사업지로 적용되면서 도시재생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은 쇠퇴한 도시를 주민 참여를 바탕으로 활력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동네를 되살리기 위해 주민들의 힘을 모을 사람이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주민활동을 이끄는 선구자로 마을활동가가 됐다.

    김씨가 ‘3·15 희망나무’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3일 창원시 마산 창동을 찾으면서 김경년 문화관광해설사(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 해설사팀장)가 안내를 하고 있다.

    ◇‘창동을 지키는 아지매’

    김 씨는 지금 창동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가고 있다고 말을 한다. 꿈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마을활동가의 삶도 그렇다. 창동 골목골목을 매일 거닐며 변함없이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가 최선을 다한 일이 창원시의 도시재생 추진에 있어 각 사업의 과정마다 참여를 하고 직접적인 활동에 앞장서면서, 늘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주민이 동참할 수 있게 힘을 쓴 것이다.

    지역사회 연대와 문화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 창동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가 크다. 그가 주민들과 함께한 노력 중 단연 주목을 받은 것은 골목에 시민 315명의 희망 메시지를 벽화를 밑바탕으로 해서 조형물로 만든 ‘3·15 희망나무’와 315명이 1인 1화분을 갖는 ‘3·15 꽃 골목’을 기획하고 조성한 것 등이다.

    그는 이를 위해 창동예술촌 작가의 손을 빌리고 또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았다. “골목에 예쁜 꽃과 나무를 심고 싶은데 당시 행정도 예산지원이 안 된다고 하고 다들 어렵다 하잖아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서 주민을 모으고 함께 창동만의 꽃을 심고 나무를 심었죠.”

    김 씨는 창동의 마을활동가로 주목을 받아 지난 2014년 2월~10월 창원시에선 처음으로 창동예술촌 골목해설사로 단기 채용이 됐다. 이어 지난 2015년 3월부턴 창원시 도시재생지원센터의 해설사팀장을 맡게 됐다. 그는 도시재생이 전국으로 화두가 되면서 전국 지역과 대학 등지로 마을활동가 강의를 다니고 있으며, 창동에서 한 해 3000명 넘는 대상에 골목안내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그를 데려가려는 스카우트 제안도 많았지만 한결같이 거절했다. “너희 동네 아지매를 만들어야 브랜드를 만든다.” 그가 지금껏 해온 답변이다.

    김 씨는 언제까지나 창동에 있을 것이라 말을 한다. 그는 “내 삶에 가야 할 길이 정해졌다. 동네를 평생 가꾸며 사는 것이다. 항상 하는 말이 그렇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면서 “남은 몇 년간 50대까지 직업인으로 있고 60대엔 자유인으로 동네에서 실컷 뛰어놀 것이다. 창동을 지키는 창동아지매로 남고 싶다”고 했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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