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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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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가을의 기도- 김정숙(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19-10-24 20: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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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은 나의 제2의 고향이다. 부산 대연동 못골시장터에서 태어난 나는 교직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폐병으로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직장을 옮기셨는데, 가족과 함께 초등학교 때 이사를 와서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다.

    가지산과 종남산 백운산 화악산 등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되는 맑은 물줄기들이 모여 아름다운 풍경과 뛰어난 절경이 많아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곳곳에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을이 저물기 전에 단풍놀이 가자고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제안하여 밀양에 모였다. 이미 친구들의 마음에는 단풍이 들어 있었고 약간의 간식을 준비해서 먼저 찾은 곳은 재약산 북쪽 중턱 해발 600~700m의 계곡에 자리한 얼음골이다. 기이한 천혜의 자연이 숨어있는 밀양 3대 신비 중의 하나에 들어가며, 바위 틈에 3월부터 얼음이 얼어 여름 7월 중순까지 냉기를 느낄 수 있고, 주변의 가마불 절벽의 폭포 등 경관이 뛰어나서 어릴 적 가족들과 여름에 피서 휴양지로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고 결혼해서는 내 아들들이 어릴 때도 여름이면 찾아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지나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표충사 뒤 재약산으로 가는 길이 정말 장관이었다. 사자평 분교였던 자리에 아직도 단풍나무는 빨간 다홍빛을 그대로 지니고 버티고 있었고 125만평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광활한 분지에 억새꽃이 피어서 하늘과 맞닿은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환호성을 토해내는 친구들의 멋스러움과 가을이면 스스로 맑아지는 파란 하늘과 은빛 물결의 억새꽃을 보며 조용히 나의 기도를 펼쳐본다.

    ‘가을에는 잎새에 사랑이 곱게 물들어 잎 진 자리에 열매를 보는 희망을 주시고 낙엽이 떨어져 그리움 쏟아져도 혼자 외로움으로 슬프지 않게 하소서

    가을에는 들녘에 노을빛으로 누운 억새꽃이 설움에 아프지 않게 하시고 끝내 매달리다 떨어지는 낙조를 보면서 이별 아닌 재회를 기다리는 용기를 주소서

    가을에는 별빛을 안고 피어나는 달맞이꽃의 수줍음이 서로 의지가 되어 사랑이 기울지 않고 보름달처럼 환한 연인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가을에는 많은 것을 꿈꾸지 않고 탐내지 않으며 한 모금 흙과 이슬로 살아도 그저 바위틈에서 짙은 향기 품는 소박한 들국화의 속맘으로 살게 하소서

    가을이 저무는 계절에도 우리들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함께 모여서 어울리는 억새꽃의 자세를 닮고 살게 하면서 보푸라기 바람에 털어내고 새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하소서’.

    나의 아무런 욕심 없는 서툰 기도다. 어느 때 찾아와도 냉대하지 않는 산은 언제나 정직하다.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남자에게 새 여자가 생기면 먼저 사랑한 여자는 벌레 털어내듯 소름끼쳐 한다.

    스스로 검은 우물을 파다가 변심의 오물을 덮어쓰고 지치지만 산은 계절 따라 순환하면서 희망과 위안을 주는 항상 변치 않는 연인이 아닌가.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박두진 선생님의 청산도)를 읊으며 하산했다. 표충사 뜰에 활짝 핀 백일홍처럼 우리의 우정도 오래 피고 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온 즐거운 하루였다.

    김정숙(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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