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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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을 통해 배우다] (5) 석정 윤세주와 육사 이원록

독립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두 투사의 뜨거운 ‘동지애’
독립투쟁에 한몸 바친 석정 윤세주
석정을 스승처럼 따랐던 시인 이육사

  • 기사입력 : 2019-10-06 20: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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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년 전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에 대한 영화 ‘동주’가 상영됐다. 꿈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그 시절, 창씨개명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강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시를 쓰는 윤동주와 행동으로 저항하는 송몽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들보다 더 애절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석정 윤세주와 육사 이원록!

    시인 이육사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롤모델이었던 독립투사 석정 윤세주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의 지혜의 주머니이자 평생 동지였고, 아우였으며 친구였던 윤세주는 약산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일제와의 전투 중에 순국했으나, 그의 등장에는 언제나 김원봉이 함께였기에 약산과 함께 우리 역사 속에서 묻힌 인물이었다.

    200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렸던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우리 곁으로 조금씩 다가온 그의 삶은 온전한 독립투쟁의 길이었다. 그런 그를 스승처럼 따랐던 청년 시인 이육사, 그들의 동지애는 우정보다 사랑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석정 윤세주./경남신문DB/
    석정 윤세주./경남신문DB/
    저항시인 이육사가 옥사하기 3년 전인 1941년 4월 29일 생일 아침에 친구에게 전한다며 자필을 남긴 사진./이육사문학관/
    저항시인 이육사가 옥사하기 3년 전인 1941년 4월 29일 생일 아침에 친구에게 전한다며 자필을 남긴 사진./이육사문학관/

    이육사가 쓴 수필 ‘연인기(戀印記)’에는 봄비 잘 오기로 유명한 남경(난징)의 여관살이의 쓸쓸함 중에 그곳에서 얻은 모시칠월장이 새겨진 비취 인장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 인장을 늘 몸에 지니고 있었던 육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됐고, 상해(상하이)에서 문우들과 ‘최후의 만향’을 같이했다. 그들 중 S에게 무엇이나 기념품을 주고 와야 할 처지임을 느끼고 그에게 ‘증S, 1933.9.10. 육사’를 새겨 내 평생 잊지 못할 하루를 기념하고 이 땅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되어가는 즈음, S가 생각날 때마다 비취인을 생각한다고 했다.

    이육사(오른쪽)가 평소 즐겨 입던 양복 대신 한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육사문학관/
    이육사(오른쪽)가 평소 즐겨 입던 양복 대신 한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육사문학관/

    “S는 그 나의 귀여운 인(印)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태산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나는 오늘밤도 이불 속에서 모시칠월장이나 한 번 외워보리라, 나의 비취인과 S의 무강을 빌면서.” 이 글 속의 S가 바로 석정 윤세주이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은 ‘청포도’일 것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꿈꾸며가 아닌 미래형)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 간다. 그리고 일본도 끝장난다. 그 선봉장이 석정 윤세주다. 그의 시 청포도는 바로 석정 윤세주를 위한 노래였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는 ‘용수를 쓰고 두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자신을 안아주거나 예뻐했던 기억이 아니라 용수 쓴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기억하고 살면서도 그녀는 아버지의 유택을 지키며, 이육사문학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윤세주는 1900년(호적에는 1901)에 밀양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바로 옆집이 약산 김원봉의 생가이다. 약산보다는 두 살 어린 윤세주는 약산과 어울리며 자랐다. 약산의 동생보다 더 약산을 따랐던 그는 1919년 밀양의 3·13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김원봉 등과 만나 ‘의열단’ 창단에 앞장섰으며, 의열단 제1차 국내기관총공격 당시 경찰에 쫓겨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밀양 출신 한봉근, 김상윤,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자원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밀고자에 의해 서울에서 체포돼 7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윤세주는 7년형이 선고되자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피포되고 판죄되었지만 피포되지 않은 우리의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고 외쳤다.

    1927년 2월 7일 출옥한 그는 고향 밀양에 돌아와 신간회 밀양지회 총무간사 및 밀양청년회 활동을 하다 스승인 백민 황상규와 부친의 죽음 뒤,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 때 함께 간 사람이 이육사였다. 국내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육사도 이미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감옥살이를 한 후였다.

    남경으로 가 약산 김원봉과 다시 만난 윤세주는 이육사와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졸업했다. 윤세주는 석정(石鼎)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2기생부터 교관으로 활동했고, 육사는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가야만 했다. 이들 두 사람은 상해에 와서 ‘최후의 만향’을 했고 육사는 그가 아끼던 비취인장을 석정에게 주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육사는 석정이 청포를 입고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석정 또한 육사와의 만남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1942년 일본군이 태항산(타이항산)에 주둔 중이던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섬멸하기 위해 ‘무쇠팔뚝작전’ 또는 ‘참빗작전’이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청천과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홍사익이 일본군 사령관이었다. 동족을 죽이려 탱크와 비행기까지 동원한 그 작전에 맞서 ‘반소탕전’을 벌였던 한중연합군은 십자령 계곡에서 적에게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퇴로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 지대장이 30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일본군을 교란시켰다. 이 틈을 타 비무장대원들을 피난시키던 석정 윤세주는 들려오는 일본말을 통해 들켰음을 알고, 적을 유인하기 위해 진광화와 함께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다. 진광화는 총을 맞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석정은 허벅지에 총을 맞아 기절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일본군이 물러난 뒤 깨어난 석정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장자령 계곡에서 기다려야 했다. 바로 동지들이 찾아왔으나 또다시 일본군이 나타나자 자신을 두고 피하라고 동지들을 보낸 그는 쓸쓸히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어갔다. 1942년 6월 3일, 4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동지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전쟁 중임에도 1942년 10월, 그를 태항산맥 연화산 자락에 팔로군장으로 장례를 치러 안장했다.

    중국 태항산에 있는 석정 윤세주의 묘./경남신문DB/
    중국 태항산에 있는 석정 윤세주의 묘./경남신문DB/

    1950년 한단역 근처에 있는 ‘진기로예열사능원’으로 묘를 옮겼으나, 그의 초장지인 석문촌의 무덤은 아직도 중국 한단시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그의 초장지에 한중우호의 숲이 조성돼 여름철이면 무궁화가 만발해 석정과 진광화의 넋을 노래하고 있다. 석정은 간부학교 2기생의 졸업식에서 ‘혁명을 위하여 동지를 위하여 죽었다고 말해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훈화했다. 그는 실천을 통해 그 말을 지켰다. 동지를 구하기 위해 그는 과감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1982)을 추서했다.

    한편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육사는 1934년, 1936년에 피검됐고, 1939년에 청포도를 통해 석정에 대한 그리움과 믿음을 표현했다. 1942년 다시 체포돼 북경으로 압송됐고, 1944년 1월 16일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역사탐방 때마다 그가 숨을 거뒀던 북경헌병대 감옥에 있는 포도나무의 잎이 끊임없이 그가 심문을 받았던 지하 창문을 향해 뻗어가고 있음을 보며 청포도를 읊었다.

    최필숙 밀양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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