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7일 (목)
전체메뉴

[수요문화기획] 2019 문자문명전

휘두르는 붓놀림으로 새긴 ‘휘둘리지 않는 삶’

  • 기사입력 : 2019-10-01 20:50:42
  •   
  • 한반도의 문자문명을 고찰하는 ‘2019 문자문명전’이 지난달 26일 개막했다. 올해로 11회째를 맞은 2019문자문명전은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을 주제로 삼았다.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은 주역에 나오는 대목으로, ‘홀로 서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주제는 올해가 기미 독립선언 100주년이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독립’ 휘둘리지 않는 삶

    이번 해 문자문명전은 역시나 창원 성산아트홀 전관에 걸쳐 작품을 선보인다. 중견작가들의 다소 정적이고 익숙해 보이는 작품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띈 섹션은 제2전시실. 이 섹션은 20~30대 젊은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졌다. 특히 젊은 작가들이 말하는 ‘독립’은 일제강점이라는 정치적 폭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협소한 개념이 아니다. 생존의 본원적 인식이자, 현대를 살아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기인식에서 출발하는 ‘독립’이다. 그래서 타이틀도 ‘獨立意志(독립의지)-휘둘리지 않는 삶’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김나리 큐레이터는 “일상생활에서의 독립과 그 의지가 문자라는 시각예술로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 현대미술의 조형적 언어로 살펴보는 전시이다. 휘둘리지 않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양식을 갖출 수 있는지 작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안한다”고 밝혔다. 작품을 출품한 정진경, 이정희, 한소현 작가를 만나 각자 작품에 녹여낸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진경 작가:여자, 엄마, 작가로서의 독립적인 삶을 말하다

    정진경 작가는 VR를 이용한 ‘죄의 목록’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이는 매우 자전적인 작품으로, 일기를 써내려가듯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와 갈등을 하루하루 적어나간 목록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이를 가상현실 속에 구현해 비밀스러운 그녀만의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형식을 택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2019 문자문명전’ 개막식에서 정진경 작가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지난달 26일 오후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2019 문자문명전’ 개막식에서 정진경 작가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이 작업은 정 작가가 2008년부터 진행해 온 작업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아이의 어머니로서, 또 작가로서 그녀가 처한 상황과 이에 대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았다.

    정 작가는 “처음에는 외할머니가 손녀의 안녕을 바라며 건네주신 금강아미타경의 글귀를 적기 시작한 것이 이 작업의 단초였다. 그것이 이제는 나의 언어가 되었고, 혼잣말을 적어가며 관객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방식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을 관객과 공유하며 서로가 가진 짐을 같이 덜고자 하는 작은 바람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전시 개막식에서 ‘죄의 무게’라는 퍼포먼스도 선을 보였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먹으로 적은 죄의 목록을 씻어내며 내면의 죄스러운 마음을 정화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정희 작가:잊혀지는 것들에 대하여

    청바지 등 다양한 섬유를 소재로 작품을 해오고 있는 이정희 작가는 독립 운동가를 대하는 현 세대의 태도에 주목했다. 이 작가는 언론사가 작성한 3·1운동 100주년 관련기사 가운데 방치되고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한 기사’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투쟁했던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상당수의 표지석이 쓰레기나 잡동사니들로 뒤덮여 있다는 현실을 확인했다.

    이정희 作 ‘잊혀지다’
    이정희 作 ‘잊혀지다’

    이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흰 담요 위에 새긴 표지석으로 구현했다. 기사에서 찾은 방치된 장소에서 속절없이 잊혀 가고 있는 표지석의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 표지석에 적힌 문자를 그대로 천 위에 옮겨, 스텐실처럼 천 표면을 일으켰다. 관객들은 올록볼록한 문자가 새겨진 이 담요를 손으로 만지거나 쓸어볼 수 있다.

    이 작가는 “관람객들이 직접 담요를 쓸어보는 행위를 통해 표지석이 쉽게 지워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차가운 현실을 역설적이게도 따뜻한 담요로 표현해 보았다”고 설명했다.

    메인이미지
    한소현 作 ‘BLIND SPOT-제이(第二),식민의 추억’

    △한소현 작가:식민의 풍경을 전복하다

    한소현 작가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교육에 독립이라는 개념을 중첩시켜 보았다. 교육에 있어 우리는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을 품은 것. 한 작가는 내선일체, 문화통치 등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많은 일제통치의 잔재들이 교육현장에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 많다고 보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할 방식을 찾았다.

    한 작가는 “우리나라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시작부터 제대로 우리 것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바꿀 수는 없으니, 이제부터 이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밝혔다.

    한 작가의 작품 ‘BLIND SPOT-제이(第二), 식민의 추억’은 170여개의 지우개에 조각도로 글자를 새겨 몰딩 선반에 진열한 작품이다. 한 작가가 서울, 창원, 광주지역 학교의 교가 중 친일인사가 지은 노래의 가사를 일일이 분석해 그중 빈도수가 높은 낱말들을 지우개에 새겼다. 이를 통해 식민의 풍경을 전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담았다.

    △백색공간의 의미

    특이한 점은 제2전시실 전체가 모두 새하얗게, 백색으로 연출된다는 점이다. 김 큐레이터는 백색공간에 다층적인 의미를 담았다.

    김 큐레이터는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가 어떤 모습일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이 의미에서 백색은 식민의 역사와 경험을 깨끗이 지워내고 싶다는 희망을 말한다. 아울러 영국의 정치철학자 로크의 경험론에 의거한 ‘타불라 라사’라는 개념을 적용하기도 했다. 타불라 라사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새하얀 판을 말하는데, 인간이 감각적 경험을 하기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다. 특히 영국의 로크 이론을 대입한 이유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모범을 삼았던 모델이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는 벗어났지만 유럽중심적 사고와 서구열강에 의한 문화적 식민화가 지속되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019문자문명전 개요

    1전시실은 ‘有法而無法(유법이무법)-자유에 의한 자유를 위한 법’이라는 소주제를 19명 작가들의 작품을, 3전시실은 ‘哀而不傷 樂而不淫(애이불상 낙이불음)- 독립으로서의 중용’에 관해 20명 작가의 해석을, 4전시실에는 ‘含情調於豪端(함정조어호단)-감정의 자유 감성의 절조’라는 소주제 아래 84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5전시실에는 경남추천참여작가 및 공모초대참여작가 작품을, 6·7전시실은 2019문자예술공모대전 입상작을 전시한다. 전시는 오는 5일까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김유경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