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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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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밀양 남천강- 김정숙(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19-09-26 20: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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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문동 둑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나칠 때마다 나무와 꽃들 사이로 계절이 지나가고 유쾌하게 꽃반지 나누던 어릴 적 추억도 지나가고 그리고 나의 초등학교 4학년 추석날(1959년 9월17일)의 사라호 이야기도 지나간다.

    까마득히 잊혀져가는 60년 전 이야기다.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날씨가 불안했지만 추석날은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가족들과 즐거움을 나눴다.

    내 어릴 적 남천강은 날마다 순진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유혹하였다. 강가는 사계절 나의 놀이터였다.

    철교 위 기차소리가 요란해도 놀라지 않고 잘 버티던 강이 갑자기 변심한 연인처럼 비겁한 모습으로 거들먹거리며 거친 바람을 물고 숨 막히게 덤벼들었다. 제방 허리를 뚫고 범람하여 삼문동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그때 나는 구조대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들과 높은 기와집 지붕 위에서 아슬하게 버티면서 하루 낮을 보냈다.

    그때 나는 생과 사를 보았다. 필사적으로 살려고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는 목숨을 보면서 생존의 버팀이란 의지와 다르게 강한 자연에게 이길 수 없다는 무서운 힘을 보게 되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 시간들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모험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치와의 싸움에서 굴러오는 돌을 피하고 적들의 공격 속에서 가까스로 탈출하고 아슬아슬하게 살아남는 장면 못지않았다. 존스가 성궤의 보물을 결국 찾았나 하는 결말이 아니다.

    보물을 찾기 위해서 위기를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이 중요하듯이 지붕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모난 부분을 감추고 거친 상황이 밀릴수록 더 침착하게 대응하고 지혜롭게 격려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다. 저녁에 물이 차츰 빠져나가고 난 뒤 돌아온 집에는 모든 흔적들이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어머니가 직접 지으신 색동옷은 입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태풍이 할퀴고 간 그날은 내가 10년 동안 보아온 세상을 하루 만에 바꾸어놓은 자연의 오만이었다. 추석 차례음식마저 엎어 놓은 태풍이 정말 야속했고, 더 야속했던 건 태풍이 휩쓸고 간 그날 밤 하늘에 거짓말처럼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었다. 그해 추석의 밤은 너무나 심란했다.

    그때의 변덕스런 강물처럼 나도 살아오는 동안 오만하게 넘치고 날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여물어지고 강하게 단련되어 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지나간 시간들이 아닌가.

    ‘다시는 삼문동에 살지 말자, 삼문동에 살지 않으리’ 그러던 내가 지금 강이 보이는 삼문동에 살고 있다.

    그날의 허망한 꿈을 꾸던 몹쓸 사라호의 더러운 강물은 이별한지 오래다. 바다로 가서 뒹굴고 있겠지. 나는 색동저고리 마음 한쪽에 걸어두고 어릴 적 날 유혹하던 강이 좋아 강가에 살고 있다.

    인생도 무한한 직선이 아니라 둥글게 휘어지면서 순환하는 강물 같은 것. 그 후 내가 죽을 고비 넘기며 살아왔듯이 너라고 더러운 속 비우느라 죽을 고비 한 번만 있었겠느냐. 나처럼 얼굴에 붓기를 두드리며 열을 삭히느라 생고생도 했겠지.

    남천강아, 언제나 푸른 눈빛으로 마르지 말고 넘치지도 말고 흘러라. 구절초 하얀 가을에 사랑이 돌변하여 떠난다 해도 사라호 태풍만치 아프겠느냐. 내 추억이 아프게 전 강둑길 너머로 강물도 흐르고 나도 따라 흐른다.

    김정숙(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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