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촉석루] 진주성 전투와 마사다 요새 항전- 우문영(경남지방경찰청 홍보실 계장)

  • 기사입력 : 2019-09-25 20:12:04
  •   

  • 기원후 73년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유대 저항군이 마지막으로 로마군에 항전했던 천연 요새 마사다의 마지막을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생생하게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다.

    2000년이 지나 건국된 이스라엘은 ‘최후의 항전지 마사다’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스라엘의 신병 훈련을 이곳 마사다에서 마무리하면서 신병들은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한다고 전한다.

    1593년 음력 6월의 진주성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인근에 있는 많은 백성들이 안전을 위해서 진주성내로 들어왔다. 기록으로 전하는 백성들만 무려 4만명, 여기다가 호남 등 각 지역에서 지원한 의병장들과 의병들, 그리고 정규군을 합치면 무려 6~8만명 정도가 진주성에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혹한 명령 하에 진주성은 제2차 전투에서 함락되었고 성내에는 살아있는 소리 하나 들릴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보다도 2년 전인 1591년에 일어난 부산 동래성 전투의 참상은 “곡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라고 1608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기록하고 있다. 진주성 앞 남강에 유등을 띄워 6만명 이상이 희생된 진주성내 백성들과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했다고 짐작해 볼 따름이다.

    과연 촉석루가 들어선 지금의 진주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진주성을 방문하는 분들은 자기가 밟고 있는 땅과 바라보는 남강이 그런 비극과 슬픈 역사, 그리고 왜적의 총과 칼 앞에 숨져간 이름 없는 백성들의 슬픔과 아픔의 비극적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무릇 축제나 행사는 그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을 거치면서 참여자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지속 가능하거나 발전하게 된다.

    역사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되풀이되고 있다. 과거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하겠다.

    우문영(경남지방경찰청 홍보실 계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