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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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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끄럽지 않게 살기- 박형숙(경남간호사회 회장)

  • 기사입력 : 2019-08-28 20: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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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군의 첫 승리에 대한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봉오동 전투’는 가슴이 먹먹하고 뭉클해지는 영화였다. 광복절 날 딸과 함께 의미 있게 관람하면서 주인공 이장하 (유준열)의 누이 유언처럼 우리 모두 부끄럽게 살지 않기를 다짐해 봤다.

    지난 8월 15일 전국의 간호사회 17개 지부는 일제히 지역 일간지에 ‘독립운동가 34 인의 간호사’를 전면광고했다. 34인 가운데 17인은 겨우 이름과 어느 단체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은 채 작자미상으로 사진도 없다. 그런데 이종화 창원시의원이 이 광고를 접한 후 이애시에 관한 정보와 귀한 자료를 갖고 있다는 반가운 전화가 걸려 왔다. 이애시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으나 그를 고모라고 부르는 이화여대 이효재 전 교수 또한 유명한 여성운동가이고, 그 후손들이 마산 진해 등지에서 병원과 사회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 시절 초 중 고교를 거쳐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역사가요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가 모를 것인가? 그러나 그분의 부인이 군자금을 모집하고 첩보 활동을 하고 독립군을 적극적으로 치료한 박자혜 독립운동가 간호사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주를 기반으로 집집마다 말을 타고 방문하여 어린이 예방접종과 모자 보건사업을 펼친 독립운동가 간호사 한신광, 그리고 지난 2월 27일 세미나에 참석해주신 노순경 독립운동가의 외손자를 비롯해 지금은 강원도에서 의료사업을 하고 있는 후손들의 증언에따르면 그는 노백린 장군의 딸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일반인에게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밖에 없는 줄로 알고 있지만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자 목숨을 건 독립운동은 그 당시로서는 배운 지식인 간호사들의 사회적인 책무이었을 것이다. 옥중에서 일본 순사의 온갖 고문과 고초에도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겠다고 말한 14살의 어린 간호사는 모진 고문을 못 견디고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그때 경성 지방법원 판결문과 수형기록 카드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재는 독립운동가 간호사가 34인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더 발굴될 전망이다.

    74년 만에 맞이하는 올해 광복절은 우리 간호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는 1923년 조선간호부를 결성한 이래 간호교육 100주년을 3년여 남겨두고 있다. 2008년부터 ‘간호역사 뿌리 찾기 사업’을 시작해 한국 간호역사 자료집 제1권과 제2권에 한국 근대 간호역사 화보집을 발간했고, 간호사의 항일 구국운동을 2012년에 발간해 독립운동가 간호사 26명이 수록됐다.

    간호사들은 일제강점기에 뜨거운 민족의식과 기개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군대해산 당시 부상병을 간호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사회 계몽운동, 첩보활동, 적십자 활동 및 비밀연락 등 다양한 활동을 러시아 연해주, 만주, 용정, 중국 상해와 미국에서도 펼쳤으며, 간호사 양성 교육에 앞장서 왔다.

    이러한 선배 간호사의 고귀한 얼은 41만5000여 명의 간호사 회원 한 명 한 명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오로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해 어떠한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일단 환자부터 살리고 보아야 한다는 간호신념으로 전국 경향 각지에서 병원, 보건소, 학교, 농촌, 지역사회, 보건 진료소 및 산업체 등에서 땀방울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간호전선에서 땀 흘리고 있다.

    박형숙(경남간호사회 회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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