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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기억한다- 서영훈(뉴미디어부장·부국장)

  • 기사입력 : 2019-08-07 2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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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이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한일협상조약이었다. 을사년에 맺어진 5개 항목으로 이뤄진 조약이어서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하지만, 조약 체결의 강제성에 의거해 을사늑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해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5명을 을사오적이라 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를 삼고 있다.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무력함에 기인한 것이긴 해도, 당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던 열강의 셈법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다. 을사늑약 몇 달 전인 1905년 7월 말, 일본 내각총리대신 겸 임시외무대신 가쓰라 다로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는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적 지위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 협정을 체결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불리는 이 협정은 1924년에야 그 실체가 드러났다.

    각서에는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미국과 일본, 영국이 동맹관계를 확보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일본과 미국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와 필리핀을 독점적으로 나눠 갖는다는 것이 이 밀약의 핵심이었다.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그해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 또 그 다음 달에는 포츠머스조약을 맺어 영국과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각각 인정받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뺏은 데 이어 열강들과의 짬짜미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이 1910년 경술국치로 불리는 한일병합조약을 대한제국에 강제한 것은 물론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와 필리핀을 나눠 가진 두 나라였지만, 그 관계가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었다. 밀약 후 30여 년이 지나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4년 뒤 미국은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진주만 공습, 태평양전쟁, 원폭 투하, 전후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 등 역사적 사건들을 반추하면, 영원한 우방도 또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두 당사자 중 일방인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또 36년간 식민통치를 한 일본과 한·미·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매한가지다.

    결국 동맹이니 우방이니 하는 것은 국제질서의 변화 및 자국이기주의의 발현 정도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국X 믿지 말고 소련X(현재의 러시아)에 속지 마라, 일본X 일어나고 되X(중국) 되(다시) 나온다’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유행했다. 이 유행어에서 나오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양 진출과 봉쇄 등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의 손을 잡든지 멱살을 잡든지 할 열강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 미국과 중국의 경제전쟁,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등의 국면에서 열강의 표변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 왔고 또 보고 있다.

    비록 지금은 우방이라고 하지만, 일단의 시민들이 미국과 일본의 국기를 들고 서울 광화문 등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망측스럽다.

    서영훈(뉴미디어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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