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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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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640) 제24화 마법의 돌 140

“아이들은 집으로 보내요.”

  • 기사입력 : 2019-08-02 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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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때는 전교 1등을 했다. 대학교를 서울로 보내려고 했으나 류순영이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반대했다. 성희는 사흘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으나 류순영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시국이 어수선했기 때문에 더욱 서울로 보내는 것을 꺼려했다.

    “지난번에 오라고 했더니 왜 안 왔어?”

    “엄마가 올라가지 말랬어요.”

    “왜?”

    “사업하는데 방해가 된댔어요.”

    이재영은 천천히 순댓국을 먹었다. 음식점을 나오자 바람이 선선했다.

    병실로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은 집으로 보내요.”

    류순영이 눈을 감고 말했다. 이재영은 아이들을 집으로 보냈다. 류순영은 아이들이 돌아가자 잠이 들었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이재영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류순영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단양에서 지냈던 일이 떠오르고 그녀와 결혼을 하던 일도 떠올랐다.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는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두 번씩 절에 다니고 시주도 넉넉하게 했다. 중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이재영은 의자에 앉아 졸다가 류순영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새벽이었다. 류순영이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진통제를 투여하자 류순영은 30분 정도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재영은 사흘을 병원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다. 류순영도 서울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이재영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로 내려갔다. 아들 이정식은 대구에 남아 있게 했다.

    “대구에 있는 가게는 관영이에게 주는 게 어때요?”

    9월 하순에 대구에 내려갔을 때 류순영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소.”

    이재영은 대구 삼일상회 하나만 남겨놓고 다섯 가게들을 류관영에게 이전해 주었다. 하나를 남긴 것은 이재영이 처음 장사를 시작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류순영은 마지막까지 친정식구들을 생각했다.

    류순영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풍만했던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있었다.

    대구에서 거대한 소요가 일어난 것은 10월1일의 일이었다. 대구 시민들은 대구부청과 대구역, 대구공회당 앞에서 쌀값 안정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때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시민 2명이 숨졌다.

    “경찰이 시민을 죽였다.”

    시민들은 흥분하여 경찰과 맞섰다. 원인은 쌀값 폭등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과 만주 등에서 30만명이 넘는 귀향민이 대구 경북지역으로 돌아왔다. 경상도는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실업난과 쌀의 수요가 급증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리배들은 쌀값을 올리고 일본으로 밀수출을 하여 쌀값 폭등을 부채질했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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