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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살기 위해 걷는 사람들- 서영훈(문화체육부장·부국장)

  • 기사입력 : 2019-07-08 20: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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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 걷기 열풍이 분 지 족히 10년은 된 듯하다. 제주 올레길이든, 지리산 둘레길이든, 아니면 도시 근교산의 이런저런 이름을 단 숲길이든, 조그마한 배낭을 메고 창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묵묵히 길을 걷는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걷기 열풍에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이름이 빠질 수 없다. 그는 지난 2008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걸은 뒤, 자신의 태어나고 자란 제주에 이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제주 올레길 개척에 나섰다.

    산티아고 길은 서 이사장인 다녀오기 한 해 전에 출간된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와 같은 여행 에세이를 통해 국내에도 이미 상당 정도 알려져 있었다.

    코미디언이자 방송 진행자로 독일 최고의 엔터테이너라는 칭호를 얻은 하페 케르켈링은 프랑스 생장 피드 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42일간 600㎞에 이르는 ‘야고보 길’을 걸은 뒤 자신의 정체성과 신의 존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색의 글을 이 책에 담았다. 산티아고 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예수의 제자인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 하여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야고보 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서 이사장이 산티아고 길에서 받은 영감은 제주 올레길에 투영됐고, 제주 올레길의 성공은 지리산 둘레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숲길 개설을 촉발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날 몇 달 동안 자신의 몸을 한계상황으로 몰고 가며 길을 걷는 이들에게 “왜 걷는가”라는 물음을 던져 보자. 길을 걷는 사연이야 큼직한 배낭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날 수 있겠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역시 소설가는 다른가. 정유정은 지난 2014년 안나푸르나를 트레킹 한 후 써낸 에세이 ‘히말라야 환상방황’에서 히말라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네팔병’의 근원을 ‘여정의 험난함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로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만나는 특별한 순간들 때문’이라고 했다. 정유정은 트레킹 하기 전해에 소설 ‘28’을 탈고한 뒤 내부 에너지가 극심하게 고갈돼 무기력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는 ‘생존’을 위해 안나푸르나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걷는다는 것이 그저 그 길을 걸어도 되고 걷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히말라야 환상방황’이 출간됐던 그해, 4285㎞에 달하는 미국 서부지역 트레일 코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완주한 스물여섯 살 여성의 실화를 담은 영화 ‘와일드’가 나왔다. 동명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소설가 셰릴 스트레이드는 가족 문제 등으로 삶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지내다가, 자신의 몸무게를 넘는 배낭을 메고 거친 자연 속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는 여정 첫날부터 찾아오는 극한의 고행에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격언을 되뇌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뗀다.

    곧 여름휴가철이다. 남들이 다 가는 시원한 계곡이나 바닷가를 마다하고, 땡볕이 내리꽂히는 길 위에 자신의 몸을 고스란히 맡기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을 걸으려는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보자. 나는 왜 그 길 위에 서려 하는가.

    서영훈(문화체육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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