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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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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유월의 역사- 이경주(시조시인·사진작가)

  • 기사입력 : 2019-06-20 2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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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혹 비라도 내린 날에 질경이에 말갛게 달려 있는 빗방울이 땀방울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여름은 익다 못해 타고 있다. 이때쯤이면 만사가 귀찮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창원마산에서 진주로 가는 2번 국도를 일주일에 꼬박 이틀 이상을 다니고 있다. 나의 늦은 대학원의 시간표이다.

    국도 2호선은 쌀재를 뚫고 온 길과 밤밭고개 넘은 길이 만나 진동을 지나 진전에서 비로소 바다가 왼쪽으로 보이면 통영으로 가는 국도14호선과 갈라진다. 나는 예전 갓 스무 살일 때 마산에서 통영까지 혼자서 걸어서 간 적이 있다. 짐짓 별로 멀지 않으리라는 얄팍한 예단을 하고 나섰다 아주 낭패를 보았었다. 하루 종일 걸었으나 겨우 고성 배둔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선잠을 자야 했고, 다음 날 겨우 통영에 도착했을 때에는 나의 발바닥은 온통 물집이 잡혀 돌아올 때는 결국 버스를 타고 온 적이 있다. 아마도 그때의 여정은 단지 무엇을 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강원도 홍천에서의 군대 생활은 정말 추위와 더위와의 사투였다. 오월까지 야상 조끼를 입다가 유월이 오면 더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젓가락 사단의 별칭에 맞게 무지 많이 걸었다. 예전 내가 이때를 대비해 통영까지 행군연습을 한 것만 같았다. 군사우편으로 교정의 느티나무 아래로 당당히 걸어와 바람에 훅 불어 떨어져 버릴지라도 나를 기다리겠다는 여인은, 당시에는 버팀목이었는데 지금은 근황이며 전화번호도 제대로 모른다.

    그렇게 고단한 삶의 여정은 항상 사랑하고 헤어지는 서툰 일상의 연속이었다. 남보다 오래 다닌 대학 시절과 졸업과 동시에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로의 이주는 익숙하지 못해 생경하기까지 했다. 서울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며, 잦은 지방으로의 출장은 나의 몸만 부풀게 했다. 그래도 그때는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단지 일하는 것에만 매달려 돌아볼 겨를이 없을 때였다. 그렇기에 서른이 넘어설 때쯤에는 천리 길을 내려와 하루에도 몇 번씩 맞선을 보곤 했다. 그런데 지금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유월의 성하(盛夏)에 개인의 이력은 이렇게 다채로운 추억의 결로 지금은 담담히 그려낼 수 있지만, 세상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 않다. 일제 강점기 6?10만세운동이 그렇고,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있는 6·25의 아픈 역사들, 그리고 내가 겪은 유월의 항쟁이 그러하다. 최근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미 ‘암살’, ‘밀정’이라는 영화로 널리 알려졌고, 최근에는 ‘이몽’이라는 공중파 드라마로의 소재로도 나오고 있다. 김구와 같은 투사였는데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사주하고 비호하는 세력과 같은 생각인지 묻고 싶다. 월북한 백석의 시를 읽고,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을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하는 것이 뭐가 그리도 이상한가?

    독재타도를 외치다 실명한 고교 후배와 아무 이유도 없이 교문 밖을 나오다 이틀 동안 경찰에 감금, 폭행의 후유증으로 이르게 먼저 간 같은 과 수의사 후배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역사는 그 사람이 어떻게 기억하는 대로 역사를 바라본다고 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라는 리영희 선생의 글이 다시금 가슴에 박힌다.

    이렇게 계절은 늘 우리를 앞서 달리지만 차마 기록하지 못한 미련은 두근대는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경주(시조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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