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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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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경주에 가면- 이장중(수필가)

  • 기사입력 : 2019-06-06 2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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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로 문학기행을 갔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현장을 둘러볼 요량이었다. 경주는 땅속에 숨어 있는 신라를 견인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아내고 있는 모양이다. 거대한 발굴현장이다.

    오월 끝자락이지만 명색이 봄인데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한여름 날씨다. 그렇다고 계획된 일정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다. 먼저 경주 남산 삼릉의 소나무 숲을 찾았다.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의 군락은 여행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비뚤비뚤 휘어져 용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다 박제된 모습처럼 신비롭다. 어깨춤을 추는 듯 친근하다. 아무 소나무나 안아보고 싶어져 그예 한 그루를 안아보았다. 눈으로 볼 때보다 훨씬 굵었다. 갑옷 입은 나무줄기 속에는 신라 정기가 가득 들어 있지 싶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에드워드 H. 카는 말했다. 그래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다. 마주한 역사의 진실 앞에서 숙연해지고, 슬퍼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역사는 기록해야 존재하고 가치가 있다. 그 기록의 위대함을 경주에서 느꼈다.

    첨성대가 내다보이는 식당에서 떡갈비를 곁들인 쌈밥정식을 점심으로 먹었다. 일행은 대릉원에서 계림을 거쳐 최부자 집을 구경하고 유구에 의한 고증으로 복원한 웅장하고 거대한 월정교를 걸어서 건넜다.

    130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 새롭게 눈앞에 펼쳐져 감동으로 다가왔다. 월정교에서 바라보이는 반월성터에는 신라 왕궁을 복원하기 위해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월정교에서 일행을 싣고 버스는 황룡사지로 갔다. 황량한 벌판에 주춧돌만 남아서 역사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건축물 중 가장 높았다는 황룡사9층목탑이 있었던 자리에 섰다.

    심초석과 62개의 초석은 의심의 흔들림을 잡아주는 증표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목탑의 실체가 기록의 증거들로 인해 윤곽을 드러냈다. 심초석 밑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는 황룡사9층목탑의 건립 취지와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 벌판에 서 있는 우리처럼 불타버린 황룡사 잔해 위에서 황량함을 느끼고 ‘삼국유사’에 기록한 승려 일연이 있었다. 목탑 위에 올라가 경주를 바라보았다는 시를 지은 김극기란 인물도 있었다.

    남산 탑곡마애불상군의 큰 바위에 9층탑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탑의 형태는 기단에서부터 상륜부까지 갖춘 목탑 형식으로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황룡사9층목탑을 그대로 새겼다고 한다. 기록들에 의해 상상이 현실이 될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거대한 목탑의 실체를 벅찬 감동으로 바라볼 날이 언제가 될지 기약 없지만 기다릴 것이다. 돌무더기 하나, 흙덩이 하나가 모두 오랜 역사와 함께 다가온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삼국시대, 역사책을 읽으며 현실의 상황과 너무 흡사한 부분들을 본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다만 그 자리의 흔적을 찾아갈 수는 있다. 유적을 복원하면서 현실을 밝혀줄 현명한 혜안을 발견하면 좋겠다.

    웃는 얼굴이 새겨진 수막새가 온전하지 않고 상처가 나 있어도 신라의 미소로 불린다. 한 조각 파편에 남아 있는 미소 띤 얼굴이 모든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주듯이 마음에 와닿는 역사유적으로 복원되길 바라 본다.

    이장중(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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