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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593) 제24화 마법의 돌 93

  • 기사입력 : 2019-05-27 20: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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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용도 마음이 아파 동네를 몇 바뀌나 돌았다. 날이 갈수록 후지와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게 앞에서 마주치는 미야모토의 얼굴에는 편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7월이 되고 8월이 되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후지와라가 지난밤에 일본으로 돌아갔대요.”

    류순영이 절에 갔다가 돌아와서 말했다. 이재영은 가게 앞에서 인적이 없는 상가를 보고 있었다. 상가마저 행인들을 보기가 어려웠다. 수많은 장정들이 징용으로 끌려가 상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있었다.

    “집은 어떻게 하고?”

    “팔았대요.”

    “가게는?”

    “일하는 사람한테 맡기고 갔대요.”

    후지와라가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후지와라는 비교적 정세에 밝은 편이었다. 그가 돌아갔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미야모토는 더욱 신경질적이 되었다. 공연히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욕을 했다. 이재영은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오늘 정오에 중대한 발표가 있답니다.”

    삼일상회 본점에서 주임으로 일하는 박두영이 말했다. 그는 40대의 사내였다. 삼일상회에서 10대 때부터 일을 하여 그를 주인처럼 받들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중대발표는 대개 창씨개명이니 전시총동원령이니 조선인을 괴롭히는 것이라 가슴이 철렁했다.

    “천황이 육성방송을 한답니다.”

    일본인들도 곳곳에서 웅성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이재영은 정오가 되기 전부터 라디오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정오가 되었다. 라디오에서 찍찍대는 소리가 나더니 천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의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자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ㄷ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 영, 중, 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생각건대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낙(樂)을 같이 함은 황조황종의 유범(遺範)으로서 짐의 척척복응(脊脊服膺)하는 바 전일에 미 영 양국에 선전한 소이도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서기(庶幾)함에 불과하고 타국의 주권을 배(排)하고 영토를 범함은 물론 짐의 뜻이 아니었다.”

    천황은 외국을 침략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말했다.

    “…연이나 교전이 이미 사세를 열(閱)하고 짐의 육해장병의 용전, 짐의 백료유사의 정려, 짐의 일억중서의 봉공이 각각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반드시 호전되지 않으며 세계의 대세가 또한 아(我)에 불리하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無辜)를 살상하며 참해(慘害)에 급(及)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천황이 잔학한 폭탄이라고 말한 것은 원자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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