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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4-어제, 오늘 그리고 청춘] 고성오광대 이수자 최민서 씨

탈꾼으로 신명난 인생 한판
대학 새내기 때 탈춤동아리서 고성오광대 전수캠프 이후
삶의 일부 될 만큼 푹 빠져 서울·고성 오가며 전수 계속

  • 기사입력 : 2019-04-2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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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잡아먹는 괴물비비(영노)가 나타나면 양반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친다. 그중 한 양반을 붙들고 마음대로 놀려대며 혼을 내어준다. “비 ~ 비.”

    #2. 큰어미와 작은어미는 아이 쟁탈을 벌인다. “놓기는 니가 놓아도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년아.” 결국 아이를 떨어뜨려 죽이고 만다. 이에 울분을 느낀 작은어미에게 큰어미 또한 죽임을 당한다. -고성오광대 연희대본 발췌



    ‘괴물비비’와 ‘큰어미’ 등 탈을 쓴 광대들이 마당에 올라 특유의 춤사위를 펼치고 익살스러운 재담으로 시대적 애환을 풀어낸다. 이들이 만드는 신명나는 한마당은 잊지 못할 전율을 선사한다. 때문에 고성사람들 사이에 “고성에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고성오광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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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오광대 이수자 최민서씨.

    고성은 오광대가 있어 춤의 고을로 불린다. 여기 춤의 고을에서 평생 탈꾼으로 살아가려 다짐을 한 고성오광대 이수자 최민서(39)씨를 만났다. 위 연희대본 속 괴물비비와 큰어미도 최씨가 탈을 쓰기 시작한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맡은 배역들이다.
    메인이미지고성오광대 이수자 최민서씨가 큰어미탈 눈 사이로 웃음을 짖고 있다./김승권 기자/

    고성오광대는 고성에 전해 내려오는 가면극으로 흔히 탈춤으로 알려졌다.

    고성의 오광대는 다섯 방위(五方)를 상징하는 다섯 광대(廣大)가 나와 노는 놀음이란 뜻으로 오래된 관습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본다. 대부분 탈놀이가 일제강점기 단절되었다가 해방 후 1950년대 후반 복원되는 과정을 겪은 데 비해 거의 단절 없이 계승되어 우리네 고유의 탈춤 원형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 이에 춤사위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고성오광대는 지난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이후 보존회에서 매년 정기공연뿐 아니라 학생전수를 하고 있는데, 전국 무형문화재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한다. 지난 50년 가까이 전국에서 고성을 찾아 단기 전수과정(캠프) 등에 참가한 전수인원만 4만5000명에 이를 정도다. 이번 이수자인 최민서씨 역시, 그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최씨에게 그 경험이 남달랐다. 전수를 찾는 이들은 많지만, 탈꾼을 업으로 삼아 살기를 결심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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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오광대 이수자 최민서씨.

    ◆서울토박이, 고성의 ‘탈’을 쓰다

    딱 일주일, 고성오광대의 전수 캠프는 대학 새내기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최씨는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울이었다. 대학에서 우연히 든 동아리가 탈춤 동아리였고 이 동아리에 마침 탈춤으로 유명한 고성오광대의 전수캠프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제가 서울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서울 상도동, 신림동 그 주변에서 학교를 다 나오고 대학도 중앙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고성이란 지역이 있는지 몰랐어요. 고성오광대도 들어본 적이 없었죠.”

    “대학에 들어가서 뭘 해볼까 하다 우연히 ‘한백사위’라고 탈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어요. 처음에는 동아리방 곳곳에 탈이 걸려 있어서 낯선 탓에 거부감도 들었는데…. 어쩌다 정이 들고 여름방학 때 일주일간 고성오광대 캠프에도 오게 됐죠.”

    최씨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면 언제든 고성을 찾게 된다. 그는 “탈을 쓰고 신명을 나누는 것 자체가 최고였다”며 “춤추며 땀 흘리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도 한잔씩 하고 다 좋았다.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정, 믿음 이런 것들이 생겼다. 군대를 가서도 계속 생각이 나서 상병이나 병장 휴가 때면 전수를 위해 고성으로 갔다. 어느샌가 삶 일부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들었다. 경영학과를 더 다녀서 뭘 할 것인가. 학점에 맞춰서 직장을 찾고 그런 삶보다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며 “오늘만 참고 내일을 위해 살면, 내일이면 또 내일을 위해 참고 살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학점은행제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게 된다. 그는 “대학로에서 연기생활을 하고 돈벌이를 위해 영화 제작 일도 하면서 나름 꿈을 키웠다”며 “물론 고성은 빠짐없이 전수를 위해 오갔다. 고성오광대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고성사람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를 했었다”고 했다.

    ◆고성사람이 되다

    “고성에 와서 한번 살아봐라.” 기회가 찾아왔다. 이때가 지난 2012년으로 최씨가 어느덧 서른셋이 됐을 때였다. 고성오광대보존회에서 처음으로 외지인이지만 식구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최씨는 “새로 전수관을 짓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고성의 젊은이들만으로 여력이 부족했다. 꼭 고성사람이 아니더라도 고성오광대를 사랑하고 지켜갈 사람이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그렇게 제안을 받게 됐다”며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서울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성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재미로 하던 일이 업이 됐다. 고성오광대 탈놀이는 제1과장 문둥북춤, 제2과장 오광대놀이, 제3과장 비비놀음, 제4과장 승무과장, 제5과장 제밀주과장 등 총 5과장(마당)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모두 20개의 배역이 있다. 모든 배역을 익히는 것은 물론 섬세한 표현을 하기 위해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연희에 쓰이는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고 탈도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메인이미지2018년 국립무형유산원 공연중 비비역.

    최씨는 “배역마다 움직임이나 춤선이 다 다르고 표현도 달리해야 한다. 비비괴물이라면 굵게 움직여야 한다. 비비는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막내들이 주로 맡는다. 그래서 최근까지 비비 역을 많이 했고 그다음으로 큰어미 역을 맡고 있다”며 “어떤 배역이든지 다 할 수는 있어야 한다. 말뚝이나 다른 주요한 배역도 많지만 선생님들 밑에서 우러러 보며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웃음)”고 말했다.
    메인이미지충북 영동 고성오광대 공연 중 큰어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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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민서씨가 시골영감을 찾으러 가는 큰어미춤을 선보이고 있다.

    ◆달라진 사명감, 책임감의 무게

    최씨는 지난해 9월 국가지정 고성오광대 이수자가 됐다. 보존회에는 이윤석 보유자(보존회 회장)를 필두로 전수조교 5명, 이수자 13명, 전수자 12명 등 모두 31명이 있다. 이들 전승자 중에는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아 지역에 머무는 이들은 많지 않다.

    때문에 최씨는 올 들어 보존회 사무국장 후임으로 뽑혀 인수인계를 받고 있다. 그는 “전승자로서 가르침도 받지만 공연도 하고 학생들 교육에도 참여한다. 이제 책임이 더 크다”며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앞에서 너무 잘 이끌고 계시기 때문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좋아하는 고성오광대를 계속 이어가고 또 잘 전승한다면 최고의 꿈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최씨는 꼭 하고 싶다는 말로 “고성오광대는 탈놀이 원형도 잘 계승하지만 시대가 변하는 만큼 인형극이나 아동극 등 장르에도 접목을 하고 있고 공연과 교육, 체험 등으로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계속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또 청춘들에게 “고성오광대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꿈이 있다면 함께 펼쳐나가면 좋겠다.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일은, 어렵고 또 힘든 점도 많지만 함께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며 “청춘들은 꿈을 갖고 자신의 행복을 잘 찾으면 좋을 것 같다”고 전했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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