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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들

  • 기사입력 : 2019-03-0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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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한반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몸을 던졌다. 그러나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1만5000여명. 당시 독립운동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이 때문에 아직도 내 할아버지, 내 할머니의 명예를 찾지 못한 후손들은 응어리진 한을 풀지 못한 채 지난 100년의 시간과 씨름하고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 공적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를 찾지 못하거나 망실해 속앓이만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사연을 들으면 안타깝다. 하지만 누구라도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인정이 가능한 탓에 당시 객관적인 자료가 없이는 서훈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분들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서훈 기준에 맞지 않거나 아직 자료가 미비할 뿐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자료 발굴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3·1운동 정신을 창간이념으로 한 경남신문은 창간 73주년을 맞아 선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후손들을 만나 가슴속에 간직한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의병 활동’ 고 김용이(1889~1917) 선생 후손 김상명씨
    “의병 활동 큰아버지 시신도 못 찾아 명예라도 찾아 드려야지”

    1908년 19세 나이로 하동·양산서 군자금 모집 등 활동
    1917년 밀고로 달아나다 칼 맞고 바다에 빠져 숨져
    2003년 포상자 명단 올랐지만 추가자료 없어 선정 안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창포마을에 사는 김상명(82)씨는 마을 앞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큰아버지를 떠올린다.

    “저 바닷속 어딘가 백부님 시신이 있을 텐데…, 찾지도 못했네요. 큰어머니도 살아는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메인이미지고 김용이씨의 조카 김상명씨가 큰아버지의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보여주고 있다.

    김씨의 큰아버지는 고 김용이(金龍伊·1889~1917) 선생. 제적등본상 큰아버지가 숨진 장소는 당시 경남 거제·통영 해상이다. 큰아버지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후손들은 고성 개천면의 가족 묘원에 비석만 세워두고 있을 뿐이다.

    김씨의 큰아버지는 지난 1908년 6월 19세의 젊은 나이에 하동에서 의병진을 편성한 손기혁(1878~1946) 의병장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는데, 의병장이 일본경찰에 체포된 뒤인 1908년 8월부터는 양산에서 활약한 서병희 의병부대에서 이초십장(二哨什長)으로 활동했다. 김씨는 ‘독립운동사 제1권: 의병항쟁사’ 등 자료를 근거로, 이처럼 큰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의병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큰아버지는 지난 2003년 마산보훈지청에서 공훈기록 등을 검토해 발표한 ‘독립운동 참여 포상 가능자 명단’에도 오르기도 했지만, 명단에 오른 지 십수년이 흘러도 포상 대상자 선정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가능자 명단에 기재되긴 했지만, 독립운동 행적을 입증할 자료가 추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씨는 지난달 30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큰아버지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지금도 서부경남지역을 다니며 독립운동 전문가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김씨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신 뒤 시신조차 찾지 못한 큰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큰아버지가 같은 마을사람의 밀고 때문에 사망하게 됐다고 했다. 의병으로 활동하며 객지에 있던 큰아버지는 1917년 8월 말 딸의 출생 소식을 듣고 고향인 옛 양전면(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다. 하지만 마을사람의 밀고로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배를 타고 달아나다 쫓아온 일본경찰 2명과 선상에서 격투 중 칼끝에 머리를 맞고 바다에 빠져 숨졌다.

    그는 “마을사람들도 다 아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조부모님이 ‘공부하지 마라. 너무 알면 다친다’라며 큰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정을 언급하면서 말끝을 흐리시곤 하셨다”며 “큰아버지가 의병을 하면서 저의 아버지도 경찰로부터 여러 고초를 겪었다. 시시때때로 말을 타고온 경찰에 끌려가 추궁을 받느라, 기마병을 의미하는 ‘기바’라는 비아냥을 일본경찰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큰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아버지는 일본말로 ‘야까마시(시끄럽다)’라며 버럭 화를 내곤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창포에서 ‘김 포수’라고 하면 다들 안다. 포수의 시초가 큰아버지가 집 헛간 땅바닥에 묻어놓은 총이었다. 6·25전쟁 이후 산에서 총으로 노루 잡던 시절을 보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주변에서는 내가 큰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며 “고성의 집안 묘원에 시신도 없이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 한편이 쓰렸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도 후손된 도리로 큰할아버지 명예룰 찾아드려야 한다고 나에게 힘을 북돋아주면서 이렇게 나서게 됐다. 큰아버지의 독립 유공이 인정되면 진전면 임곡리 애국지사 사당에 당당히 위패를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독립만세시위 주도’ 고 박재선(1888~1951) 선생 며느리 정옥이씨
    “만세 주도 시아버지 태형 후 반신불수 유공자 인정 죽기 전 소원”

    1919년 의령 신반리 장터서 만세 주도하다 태형 받아
    활동 당시자료 잃어버린 죄책감에 수십년 뛰어다녀
    6차례 공적심사에도 객관적 자료 미비로 선정 보류돼

    합천군 삼가면 출신인 정옥이(86·여)씨는 해방 이후 꽃다운 나이에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의 박씨 집안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당시 시아버지 고 박재선(朴載善·1888~1951) 선생은 거동이 불편해 홀로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아버지의 병세는 일제에게 당한 태형 때문이었다.

    정씨의 시아버지는 지난 1919년 3월 15일 의령군 신반리 장터에서 정주성, 최한규, 장용환, 황상환, 김용구, 최영렬, 박우백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 검거돼 태형 60대를 선고받았다.

    메인이미지고 박재선씨의 며느리 정옥이씨가 시아버지의 3·1운동 참여 확인서와 탄원서를 보여주고 있다.

    정씨는 “시아버지께서는 일본 놈들한테 태형 맞았던 기억만 떠오르면 분노에 차 부들부들 떠셨다”며 “태형을 받은 뒤에는 반신불수가 되시고, 정신도 온전치 못하신 상태에서 돌아가셨다”고 가슴 아파했다.

    그렇지만 시아버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함께했던 이들 중 3명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정부의 공훈전자사료관에 있는 독립운동사 등 여러 자료에도 박씨가 당시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태형을 언도받았다는 문구가 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그 자료가 해방 이후 나온 연구자료라는 게 국가보훈처의 설명이었다.

    정씨는 시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수십년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의령군과 의령문화원으로부터 받은 3·1운동 참여확인서, 선생의 이름이 기록된 의령군 신반리 기미 3·1독립운동기념비 등 자료를 모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가보훈처는 1996년, 1999년, 2004년, 2005년, 2009년, 2014년 등 시아버지에 대한 무려 6차례에 걸쳐 공적심사를 했다. 하지만 ‘활동 당시의 객관적인 입증자료 미비’를 이유로 보류됐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태형을 당했다는 행형 기록, 신문, 잡지, 일제 정보문서, 일기, 금석문 등 당시 만들어진 객관적인 자료가 부재하다고 답변했다.

    정씨는 “시아버지가 있었던 진주교도소 등은 6·25동란 때 불이 나 행형 기록이 다 타버렸다. 진주교도소로부터 ‘1950년 이전 행형 관련 자료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27일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 자료가 없으므로 재소 사실 확인증명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확인서도 받아 제출했다”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라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정씨는 시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며 청와대, 국무총리실, 국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가보훈처 등에도 수차례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정씨가 죽기 전에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시아버지 명예 회복에 힘쓰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다.

    그는 “시집온 뒤 시아버님이 ‘네 재산이다’라며 한 보따리를 주셨는데, 그 안에 당시 만세운동을 위해 자금을 댔던 자료와 백범 김구 선생과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며 “그런데 남편을 여의고,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다가 그만 잃어버렸다. 그것만 있었어도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너무 죄송하고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죽기 전에 시아버지께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 소원이다”라며 기자의 손을 붙잡고 읍소했다.

    글= 안대훈 기자 adh@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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