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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운동 정신을 지켜나가자- 김철민(충렬사 이사·시인)

  • 기사입력 : 2019-02-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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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은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의 전환점이었던 만큼 역사적 의의도 크다고 볼 수 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각 민족이 자기의 정치적 조직이나 또는 귀속문제를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 압력을 받지 않고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1919년 기미년에 손병희 등 33인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그해 3월 1일 서울 탑골(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온 겨레가 민족해방을 위해 일본과 싸웠으나 일본군의 출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낮 12시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한꺼번에 터진 대한민국의 만세소리는 이웃나라 인도의 비폭력운동을 촉발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 3·1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날을 기해 시위를 주도하다 왜경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과 학대를 받다가 타살된 순국열사이다.

    유관순은 감옥에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절규했다

    우리 민족이 국토를 남의 손에 빼앗기고, 그 고통과 치욕에서 벗어나려고 단합해 울부짖던 때는 일제시절뿐이다.

    3·1운동의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우리 겨레가 하나가 된 일심동체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의사를 표현, 둘째 우리 겨레의 정신적 ‘나’를 찾아준 인권선언, 셋째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은 일본군의 총칼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몇 개월째 계속되었고 사상자만 5000명, 투옥자가 4만7000명에 달했다 결국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민족정신의 발굴이며 문화민족으로서의 얼이 표출된 것이다.

    3·1운동의 결과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천도교를 주축으로 기독교·불교·유교 등 종교를 초월해 온 민족이 참여한 민족의식을 높이 평가할 만한 역사상 가장 특이할 만한 민족 자립에 기초를 다지게 하였다.

    우리는 이날을 길이길이 빛내고 애국심과 자주 독립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로 국경일로 정했다.

    3·1운동이 우리에게 자유와 독립을 안겨 준 것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게기가 됐다.

    선열들의 피로써 쌓아온 숭고한 독립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기기를 바란다.

    김철민 (충렬사 이사·시인)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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