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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가왕과 꼰대-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9-02-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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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인기를 모으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복면가왕’이란 프로가 있다. ‘미스터리 음악쇼’를 표방하며 출발한 이 노래경연 프로그램의 특징은, 얼굴을 가리고 가창력만으로 ‘가왕’을 뽑는다는 점이다. 나도 한때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시청자였다. ‘시청자였다’라는 과거형 시제를 쓰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출연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걸그룹이나 아이돌 가수들을 내가 못 알아보기 때문이다.

    가면을 벗었는데도 그가 누군지 몰라서 멀뚱멀뚱 바라볼 때의 황당함과 뻘쭘함은 씁쓸하고 쓸쓸하다. 이런 소회를 토로하면 주위에서는 이렇게 충고한다. 어디 가서 절대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러면 ‘꼰대’라는 소리 듣는다고. 그렇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꼰대’의 반열에 편입되고 만 것이다. 사회적·정신적 노화는 이런 ‘황당함’과 ‘뻘쭘함’으로 자각되고 ‘씁쓸함’과 ‘쓸쓸함’으로 수긍된다.

    꼰대의 낭패는 복면가왕에만 있는 게 아니다. 더 비참한 자리는 결혼예식장이다. 예식장 안에 편안히 좌정하고 하객으로서 진심어린 축하를 할 수가 없다. 소위 ‘이벤트’ 때문이다. 난데없이 턱시도 차림의 신랑이 ‘경망스럽게’ ‘땐스’를 추기도 하고, ‘망측하게’ 신랑이 신부를 등에 태우고 엉금엉금 기기도 하고, ‘불경스럽게도’ 중인환시에 입을 쩍 맞추기까지 하니 그 ‘사태’ 앞에서 눈을 감을밖에 도리가 없다.

    신랑과 신부가 진지함과 엄숙함으로 무장한 채 평생가약을 다짐하고 그것을 하객이 공증하던 지난날의 혼례의식이 지나치게 경직된 면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해도 이 사태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하객들은 화촉 앞에 운집하는 게 아니라 접수대 앞에 장사진을 칠 뿐이다. 축의금과 식권 혹은 식대를 교환하고 서둘러 예식장을 빠져나가는 하객들의 뒷모습을 보노라면 몹시 씁쓸하다.

    꼰대의 낭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월이면 열리는 초·중·고등학교의 졸업식장 또한 만만치가 않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송사와 답사를 겪느라 안간힘으로 버티던 졸업식장의 평정심은 급기야 이 노래에 와서 무너지고 만다.

    1946년 6월 6일 공표된 윤석중 작사/정순칠 작곡의 이 ‘졸업식 노래’는 교과서를 물려주던 지난날의 세태가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오랫동안 사귀었던…”으로 시작되는 ‘올드 랭 사인’으로 바뀌더니 언제부턴가 공일오비의 <이젠 안녕>, 빅뱅의 <라스트 댄스> 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획일화된 졸업식장의 풍경에서 탈피하여 학생들이 그들만의 감성으로 졸업식장을 바꾼 것이다. 이 바뀐 졸업식장의 풍경 앞에서 꼰대들은 씁쓸하기보다 불안하다. 이별의 무거움이 버겁지 않은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고 이별이 너무 가볍게 여겨지는 것은 못 미덥기 때문이다.

    복면이란 진면목을 알아보는 자에게 유효하다. 벗어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미 복면은 그 일차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복면가왕의 무대를 현실의 무대로 확장해서 해석한다면, 복면을 쓰고 있는 쪽은 가수가 아니라 시청자일 수도 있다. 전통과 보수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쓰고 있는 ‘꼰대’라는 복면 말이다. 복면가왕이 여전히 재미있기 위해서는 꼰대들이 공부해야 한다. 복면 속의 저들을 알아볼 때까지. 그리고 꼰대들은 부단히 성찰하고 바뀌어야 한다. 저들이 ‘꼰대의 가치’를 알아볼 때까지.

    김남호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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