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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동등한 기회와 조건- 김종광(소설가)

  • 기사입력 : 2019-02-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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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롱 피아비. 부쩍 매스컴을 타서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3쿠션 당구를 제일 잘 치는 여성 중 한 분이다. 현재 한국랭킹 1위, 세계랭킹 3위다.

    그분이 캄보디아에 계속 살았다면 그분은 당구에 ‘당’자도 모르면서 평생을 살 수 있었다. 캄보디아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당구 인프라가 거의 없는 나라였다. 그분이 한국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한국인 남편이 그녀를 당구장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당구장에 갔을 때 곧바로 그렇게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남편이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 그분이 자신의 재능을 믿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아내가 성과를 보인 뒤에도 남편이 계속 격려하고 응원하고 최대한 돕지 않았다면, 그분의 성공신화는 불가능했을 테다. 이런 경우가 희박하기에 뉴스가 되고 화제가 되는 것이다.

    EBS시사교양다큐 ‘극한직업’. 방송사의 설명에 따르면 ‘극한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숭고한 의지와 잃어가고 있는 직업정신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근로자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고 꼭 ‘작업자’라고 하는데, 어떤 직업이 되었든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피디와 작업자의 대화가 있다.

    “힘들지 않으세요?”(힘든 사람한테 힘드냐는 질문을 하는 게 왜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아무튼) “그럼, 힘들지 안 힘들어. 안 아픈 데가 없지.” “이렇게 힘든데 왜 하세요?” “먹고살려면 해야지.” 혹은 “처자식(가족) 먹여 살리려면 힘들어도 참고 해야지.” “이렇게 힘든 일을 왜 하세요?”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

    그 육체적으로 힘들고 성취감을 갖기 어렵고(단순 반복이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몹시 심하여서 견디기 어려운 추위’ 같은 ‘극한’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표정과 말에서, (저분들의 노동 덕분에 내가 편안히 산다는 생각은 들어도) 숭고함과 가치는 느끼기 힘들었다.

    그런 극한직업에 종사하는 분들 중에도 ‘스릉 피아비’ 같은 분이 수두룩이 있었을 테다. 그분에게도 어떤 분야에서는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을 발견하고 갈고닦아 꽃피울 수 있는 기회와 환경과 조건이 주어졌다면 그도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며 ‘숭고한 의지’와 ‘직업정신의 가치’를 누리는 삶을 살았을 테다.

    인도 카스트제도를 비인간적이라고 비웃는 분이 많은데, 과연 우리나라가 비웃을 자격이 있는 사회인지 모르겠다. 일제(日帝) 때부터만 살펴봐도 대대로 금수저고, 대대로 스카이 학벌이고, 대대로 재벌·국회의원·고급 공무원·장성·장차관이고, 대대로 건물주인이고, 대대로 극한직업에 종사한다. 물론 무수한 예외가 있었다. 하지만 ‘개천에서 난 용’보다 ‘용 집안에서 난 용’이 훨씬 많았다.

    개천에서 난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무수한 시련을 극복하며 기회를 쟁취하여 스스로 조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극한의 노력과 행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용 집안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최대한의 기회와 조건을 제공한다. 행운보다 더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극한직업 종사자들은 ‘먹고사는’ ‘먹여 살리는’ 수준이니 자식 세대에게 충분한 기회와 조건을 제공할 수 없다. 경쟁에서 밀린 극한직업 종사자들의 자식세대는 ‘스롱 피아비 같은’ 인생역전의 기회가 발생하지 않는 한, 역시 극한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테다. 대대로 부자유전사회인 것이다. 대놓고 세습하는 카스트제도랑, ‘눈 가리고 아웅’ 세습되는 우리나라 사회가 뭐가 다른가.

    우리 40·50대 아저씨 아줌마들은 반성해야 한다. 민주화운동 세대라면서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사회를 더욱더 비민주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민주화운동 세대가 진정 꿈꾸었던 것은 대개의 청년이 부모의 재력·학벌·권력·직업에 상관없이, 동등한 기회와 조건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능동적으로 선택해 숭고함과 가치를 만끽하며 안전하게 살아가는 사회 아니었던가. 그런데 우리 세대는 ‘보이지 않는 카스트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청년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동등한 기회와 조건’이다.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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