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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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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꽃- 문정희

  • 기사입력 : 2019-01-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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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 늙은 꽃을 본 적이 있는가. 매일 새로 피고 지는 무궁화부터 보름 이상 피어 있는 한국춘란도 2주가 지나면 볼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꽃에게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다고 말한다.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피는 순간부터 향기가 곧 자신임을 세상에 공표한다. 어디에 피어 있는지 몰라도 향기가 스치면 꽃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꽃눈. 꽃봉오리. 개화. 시드는’ 과정이 있는 분별이 아니라 오직 향기로 세상에 자신을 각인시키고 향기와 함께 사라진다. 꽃은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어 필 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꽃에게 향기는 자존심이며 본질이고 전부다.

    문정희 시인은 시집 <다산의 처녀> 맨 첫 장에 이 시를 실은 이유에서 ‘목숨이란 순간을 피우는 눈부신 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세상에 늙은 꽃이 없듯이 사람 또한 늙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이미 ‘순간순간 피어나는 눈부신 꽃’이라고, 향기롭고, 충분히 아름답다고, 사람은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살아가는 동안 매순간이 ‘눈부신 꽃의 시절’이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었다 해서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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