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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여자 사람- 박한규(대한법률구조공단홍보실장)

  • 기사입력 : 2019-01-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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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이 있었다. 지난해에 이어 질문자도 질문 내용도 전혀 미리 정하지 않은 각본 없는 회견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답변은 준비할 수 없다. 회견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모습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이 땅에서는 오래 무시됐고 심지어 상당수의 국민들은 그 실상마저도 몰랐다.

    각본이 없으면 이런저런 돌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커진다. 오늘 내 귀에 이 대목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들린 이유가 회견 전날 불거진 어느 운동선수에 대한 성추행 폭로나 같은 날 열린 안희정 전 지사의 재판과 무관하지 않지 싶다. 또 영국 국영방송사(BBC) 기자가 질문에서도 언급한 지난해부터 불고 있는 미투 열풍 이후에 크게 달라진 사회 분위기와도 분명 관련이 있을 거다.

    회견 초반에 대통령은 질문자를 지명하면서 ‘여자 분, 여자 기자님’이라는 표현을 썼다. 순간 나는 움찔했다.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몇 명의 여성 기자 - 이 표현마저도 조심스럽고 적절한지 자신이 없다. 혹 부적절하다면 미리 사과한다- 에게 질문의 기회를 줬지만, 더는 어떤 비슷한 표현도 들을 수 없었다. 다행이다. 누군가가 그 표현의 문제성을 인식하고 대통령에게 쪽지를 건넸으리라 상상한다. 대통령 역시 심각성을 인식했으니 오랜 습관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혹시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질문자를 구체적으로 지명하기 위해 어떤 다른 표현을 썼을까? 쉬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남자 기자를 지명하기 위해 ‘남자분, 남자 기자’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여자 분, 여자 기자’가 성차별적 표현이라 비판한다면 반론이 궁하다. 대안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나는 1962년생으로 만 56세를 조금 넘겼다. 대통령은 나보다 9년을 더 이 땅에서 살았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에서 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대통령도 나도 그런 상황에서 ‘여자 분, 여자 기자’가 아닌 다른 적절한 표현을 바로 찾는 일이 어렵다. 비슷한 나이의 대한민국 남성 그 누구라고 얼마나 다를까?

    불편한 현실이지만 인정하고 너나 없이 반성할 일이다. 이런 사소한 말과 행동들이 자기를 가르치는 어른에게 여고생 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하고도 수년간 가슴앓이만 해야 하고 또 드러나 본들 비난과 처벌은 약소한 세상을 허용, 묵인, 방조하지나 않았는지 냉철하게 되돌아볼 일이다.

    세상은 바뀐다. 바뀌지 않는 유일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뀐다’는 명제뿐이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가치, 생각, 행동을 요구한다. 놀랍도록 바뀐 기자회견의 작지만 큰 옥에 티다. 대통령도 신이 아니기에 범할 수 있는 실수의 범위 안에 드는 일이라고 본다. 본인이나 현장의 보좌진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즉시 조치를 한 모습만 해도 상당한 진전으로 평가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면 희망은 있다. 이 땅의 여성들이 차별받거나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날이 앞당겨지기를 기원한다.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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