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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공룡은 축구를 하지 않는다- 안정희

  • 기사입력 : 2019-01-01 23: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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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가 일거리를 찾아 지방으로 떠난 후,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요즘 들어 가려움증이 부쩍 심해졌다. 어제도 밤새도록 긁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세수만 대충 하고 집을 나섰다.

    아줌마는 벌써 나와 있었다. 둥그런 교차로 한 복판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저글링을 하고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란 공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아줌마 손으로 떨어졌다 다시 튀어 올랐다.

    차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어쩌다 차문을 내리고 고개를 빼어 내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이 거리를 처음 지나는 사람들일 거다. 아줌마의 저글링은 동네 사람들에겐 더 이상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아줌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그 자리에서 저글링을 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해가 진 후 아줌마가 어디로 가는 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줌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신나게 춤을 추며 저글링을 했다.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휴대폰을 보았다. 잘못하다간 지각이다. 나는 달렸다.

    운동장을 들어서는데 맘모스 고성준이 보였다. 달아나려는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넝!"

    성준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어, 아넝!"

    나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지나갔다.

    성준은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얘한테 걸리면 골치 아프다. 하루 종일 마주칠 때마다 '아넝!'하고 인사를 해 대니까. 고성준은 거인증인가 뭔가를 앓고 있었다. 6학년인데 키가 190이 넘고, 몸무게는 150키로가 넘는다. 그 거대한 몸으로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만나는 아이들 모두에게 활짝 웃으면서 '아넝!'을 외쳐댄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누구나 맘모스 고성준을 피해 갈 수가 없다. 그러느라 성준이는 늘 지각이었다. 더 이상 인사를 나눌 사람이 없어야 성준이는 교실로 들어왔다.

    어젯밤 제대로 못 자서인지 첫 시간부터 졸렸다. 난 연필로 손바닥을 찔러대다가 1교시가 끝나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앗싸, 체육시간이다!" 남자애들이 괴성을 질러대는 통에 자는 걸 포기했다.

    "오늘도 여자는 피구, 남자는 축구다."

    체육선생님 말에 남자애들은 좋아라 어깨춤을 췄고, 여자애들은 툴툴대며 피구장으로 갔다. 체육선생님은 늘 그랬듯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말했다.

    "정훈이랑 지성이, 나와서 팀 짜!"

    체육시간 때문에 하루를 사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정훈이랑 지성이가 나왔다.

    "김사울!"

    정훈이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짜증스럽게 불렀다.

    오늘도 나는 꼴등으로 뽑혔다. 굴욕적이지만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고, 이왕 뽑혔으니 열심히 하기로 했다. 나는 지성이 뒤를 바짝 쫓았다. 저쪽 주장만 밀착방어해도 우리 팀에 큰 공을 세우는 거다.

    "뭐야, 이건."

    지성이가, 따라붙는 내 가슴팍을 팔꿈치로 찍었다. 숨이 컥 막혔다. 나는 밀착방어를 포기했다. 대신 이번에는 우리 주장 정훈이를 따라 뛰었다.

    전엔 이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대충 슬슬 멀찍이서 따라다녔다. 그랬더니 성의 없게 한다며 같은 팀 애들한테 욕을 먹었다. 체육 선생님한테도 한 소리 듣고. 그래서 요즘에는 하기 싫어도 열심히 뛰어다닌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정훈이가 긴 드리블로 골인을 하려는 순간, 내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병신자식, 찌그러져 있으라니까 왜 알짱대!"

    정훈이가 벌떡 일어나면서 내 배를 걷어찼다. 나는 배를 안고 고꾸라졌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켰다. 지성이었다.

    "큭큭. 잘 했어, 김사울. 넌 역시 엑스맨이야."

    상대팀 애들이 배꼽을 잡고 웃고 우리 팀 애들은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 때였다.

    투두둑. 등 쪽에서 또 살갗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2년 전, 엄마랑 헤어지고 난 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이사 온 날 밤이었다. 등 한가운데가 가려운데, 가려워서 미치겠는데 아빠한테 말 걸기가 왠지 어려웠다. 침대 모서리에 대고 북북 문질렀는데 이렇게 등가죽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 거울에 비춰봤지만 등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가려운 것도 없어져서 잊고 지나갔다.

    아빠가 이곳에서 구한 직장에서도 잘린 날 밤. 그날은 좀 더 강한 느낌이 왔다.

    손 거울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거울에 마주 비춰봤더니 이상한 것이 보였다. 등 한가운데 살갗이 벌어져 있고, 그 사이로 초록색 피부가 보였다. 너무 놀랐지만 그날도 아빠한테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끝내 아빠한테 말하지 못했다.

    아빠가 일 때문에 몇 주씩 다른 지방에 머무르게 되자 내 증상은 더 심해졌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실로 달려갔다.

    나는 곧장 선생님들이 읽는 책 코너로 갔다. 거기에서 다른 책들보다 두 배쯤 크고 딱딱한 표지로 되어 있는 책을 꺼냈다. 한글을 떼고 나서 지금까지, 손에 닿는 공룡 책들은 다 읽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초등학생용 책이었다. 요즘 발견한 이 책은, 좀 어렵긴 했지만 공룡에 대한 내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 주었다.

    한참 보다가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내 자리에 웬 여자애가 앉아있었다.

    놀랍게도 그 애는 우리 반 오유라였다.

    오유라와 나는 우리 반 공식 왕따다. 나는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운동이나 게임에 젬병이어서 왕따가 되었지만, 오유라는 아니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별로 빠지는 게 없었다. 유라는 늘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고 있었다. 애들이 이런 저런 말을 시켜봤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차츰 아무도 유라를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

    "네가 보던 거니?"

    오유라가 물었다. 오유라가 누구한테 말을 거는 건 처음 보았다. 더구나 나한테. 나도 몰래 가슴이 후두둑 뛰었다.

    "공룡책 좋아해서."

    내 말에 오유라가 활짝 웃었다. 저런 모습도 처음 봤다.

    "나돈데. 가끔 이 책 보거든."

    메인이미지

    더 가슴이 뛰었다. 유라랑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나갈래?"

    우리는 도서관을 나와 학교 뒷산이 시작되는 나무그늘로 갔다.

    "공룡은 멸종되지 않았어."

    유라가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내가 늘 하는 생각을 얘도 하다니.

    "믿을 만한 사이트에서 봤는데."

    유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어디엔가 공룡들이 살아있고, 가끔은 모임도 가진다는 거야. 물론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는 않는대. 평소에는 진화한 모습을 하고 있거든."

    나는 놀라서 입을 벌리고 유라를 쳐다봤다.

    "새 말야? 어떤 과학자들은 공룡이 새로 진화했다더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불만스럽게 투덜대는데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유라 팔꿈치였다. 거칠거칠한 것이 마치 살갗이 벌어진 것 같았다.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유라가 흠칫하며 팔꿈치를 가렸다. 나는 바지를 걷어 올려 종아리를 보여주었다.

    "어머머, 너도?"

    유라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음, 가끔 그래. 요즘엔 더 심하고."

    피부 얘기를 하느라 더 이상 공룡들의 모임에 대해선 말하지 못했다.

    그 후 유라도 못 만났다. 교실에서는 봤지만 유라는 전처럼 날 무심히 대했다.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일이 연장되어 몇 주 더 지방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아빠를 못 본 지 삼 주가 지났는데 또 몇 주 더 기다리라니. 하필이면 체육시간이 들어있는 날이었다. 똑같이 축구를 했고, 나는 연속으로 헛발질을 날려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욕을 얻어먹었다.

    오징어처럼 납작해진 기분으로 도서실에 갔다.

    공룡은 멸종된 게 맞을지도 모른다. 환경에 적응을 못하면 도태되는 거지 뭐.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장을 건성으로 펄럭펄럭 넘겼다.

    그 때, 내 어깨를 살며시 짚는 손이 있었다. 유라였다.

    "나가자."

    유라가 말했다. 나는 책을 놓고 일어섰다.

    학교 뒷산이 시작되는 나무그늘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마치 화살을 내리꽂듯 사납게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유라 손을 잡았다. 학교 쪽으로 뛰어가려는데 유라가 내 손을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학교 뒷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 산으로 뛰어올라갔다.

    얼마쯤 갔을까. 이상하게 가슴이 툭 트이면서 온몸이 시원해졌다.

    조금 더 올라가니 갑자기 앞이 환해졌다.

    드넓은 공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쏟아지던 빗줄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딱 그치고 해가 반짝 떠올랐다. 이슬이 영롱하게 맺힌 풀잎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한 무리의 공룡들이 푸른 풀밭을 유유히 걷고 있는 것을.

    나는 유라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유라가, 오유라가 공룡이 되어 있었다. 소스라쳐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유라가 내 모습을 가리켰다. 내 몸을 내려다보니 나도 공룡이 되어 있었다.

    "바로 우리였던 거야?"

    내가 유라에게 소리쳤다.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우리 지역에서는 처음 열리는 공룡들의 파티야."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쪽에서 몸집이 거대한 공룡이 느릿느릿 두 발로 걸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가슴에 모은 앞발 중 오른 쪽을 들어 흔들었다.

    "아넝!"

    나도 모르게 인사를 따라했다.

    "아아, 아넝! 너 맘모스 고성준이구나."

    "공룡 고성준이지."

    유라가 대신 대답했다. 공룡 성준이는 전처럼 말없이 입을 벌려 웃기만 했다.

    저쪽에서 저글링을 하는 공룡이 눈에 들어왔다. 몸집은 자그마한데 공 한 번 떨어뜨리지 않고 빨강, 파랑, 노랑 공들을 차례로 던져 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떠오르는 공룡들이 있었다. 허리가 완전 구부러져 네 발로 겨우 걷고 있는 공룡은 우리 동네 파지 할머니랑 많이 닮았다. 저기,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서서 지나가는 공룡들에게 시비를 거는 공룡은 내가 아는 건달 형하고 많이 닮았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닮은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맞아. 생각보다 공룡들이 많이 살아남았다니까. 사람처럼 살려니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사람으로 진화된 게 아니라 위장하고 있는 거거든."

    나무그늘에서 유라랑 쉬고 있을 때 저 쪽 끝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공룡이 있었다.

    "역시 맞구나. 김사울이었어!"

    커다란 덩치의 공룡이 앞발을 내밀고 달려드는 바람에 나는 벌렁 나가떨어졌다.

    "하하하. 김사울! 나야 나. 아빠야."

    자세히 보니 아빠가 맞다. 그 제서야 아빠도 온 몸을 북북 긁어대던 게 생각났다.

    "그 동안 왜 숨겼어요?"

    내 말에 아빠가 히히 웃으며 달아났다.

    "너도 숨겼잖아, 임마!"

    나도 장난삼아 아빠공룡을 쫓아갔다. 눈부신 햇살이 푸른 풀밭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공룡들은 천천히 여유롭게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공룡은 달리기를 하고, 어떤 공룡은 앉아 있었으며, 어떤 공룡은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하나하나 아름다웠다. 거기엔, 억지로 축구 같은 걸 하는 공룡은 없었다.

    한참을 공룡아빠를 따라 달리다 문득 돌아보았다. 저 뒤에서 유라 공룡이 앞발을 들어 흔들었다. 유라 공룡도 행복해 보였다. 나도 유라 공룡에게 앞발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다 무엇엔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일어나, 김사울. 일어나라니까!"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빠가 안 보였다. 푸르른 초원도 사라졌다.

    "야, 여기서 자면 어떡하니? 도서실 문 닫는대."

    유라 공룡이, 아니 사람 유라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우린 밖으로 나왔다.

    "공룡이 멸종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공룡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니까."

    나는 중얼거렸다. 유라가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아직도 그 얘기야? 인간 오유라는 궁금하지 않아?"

    유라가 말해 놓고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난 공룡이 어디엔가 살아있다고 믿어. 공룡은 그 자체로 완벽하니까."

    유라가 내 말투를 그대로 따라했다. 확실히 공룡 유라보다는 사람 유라가 훨씬 더 예뻤다. 나는 유라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우리 얼굴을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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