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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아버지와 면 서기- 서동욱(창녕중 교장)

  • 기사입력 : 2018-11-2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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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께서는 ‘메기 하품만 해도 물이 넘친다’는 우포늪 주변 가난한 마을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평생 흙을 일구며 근검절약과 성실함으로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다.

    당시의 시골 관습상 장남 우선순위에 밀려 큰아버지께서는 어려운 살림에도 대학공부를 마쳤지만, 아버지께서는 학교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이런 까닭에 배움에 한이 맺힌 아버지께서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우리 6남매 모두를 대구로 유학 보내 대학공부까지 시키셨다.

    평생을 농사일로 고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아버지 세계의 직업은 딱 둘뿐이었다. ‘공부한 사람은 면서기, 못 배운 사람은 농사일.’ 그래서인지 장남인 내게도 항상 ‘공부 열심히 해서 면 서기 돼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오래전, 군청 과장으로 재직 중인 당신의 재종 처남 부친상에 다녀오셔서는 많은 양복쟁이 문상객을 엄청 부러워하시며 가끔씩 그 일을 지나가는 듯 말씀하시면서 면 서기 되지 못한 장남에 대한 원망 섞인 아쉬움을 나타내곤 하셨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께서 평소와 달리 꼭 한 번 부탁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칠순 잔치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당신 자신을 위해 돈을 써본 일이 없으신 아버지의 뜻밖의 부탁이셨다.

    우리 6남매는 친지들과 동네 분들을 부곡하와이에 모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축의금을 사절한 잔치를 베풀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다. 그날 이후 하루 일을 마치고 매일 칠순잔치 비디오를 보시곤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린다며…. 회갑 때까지만 일하시겠다던 당신께선 3년 전 84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을 하다 우리 곁을 황망히 떠나셨다. 그날은 둘째 여동생의 49재 마지막 날이었다. 자식들에게 끔찍이도 헌신적이셨던 당신께선 여동생의 마지막 길동무가 되셨나 보다.

    돌아가신 4개월 후 난 도교육청 장학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면 서기 되기를 원하셨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면 서기 되지 못하였음을 늘 아쉬워하셨던 당신께 면사무소보다 훨씬 크고 멋진 도교육청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더라면…. 면 서기가 되지 못한 장남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상상을 해본다.

    서동욱 (창녕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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