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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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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좌우 날개가 협력 통해 균형을 잡아야만 날 수 있다

  • 기사입력 : 2018-10-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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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필용 作 ‘비상’.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우’가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할 때, 밀려 있던 ‘좌’들이 살아남으려고 하면서 ‘우’를 향해 필사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또 ‘좌’가 일방적으로 패권을 휘두르면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들이 ‘좌’를 향해 내뱉기도 한다. 이 경우에 ‘좌’가 하는 말이나 ‘우’가 하는 말이 절실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진실하지는 않다.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은 새의 비행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있는 두 날개의 상호협력과 균형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뜻인데, 말을 하면서 좌우의 균형이나 협력은 의식하지 않고, 반대쪽과의 투쟁에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한 말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니까 절실하기는 하지만, 비행의 완수보다 자기 자리의 확보만 목적으로 두고 하는 말이니 균형이나 협력은 애초에 관심도 없다. 수준도 높지 않다. 이런 어법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우’와 ‘좌’ 사이에 주도권만 왕래하지 ‘비행’은 효과적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비행’이 완수되지 않은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이륙도 못하는 새만 불쌍하다.

    ‘좌’에서건 ‘우’에서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을 하더라도, 막상 비행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 자기 날개 하나로만 날려고 한다. 마치 새에게 날개란 원래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아온 듯하다. 좌우의 날개가 상호 협력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만 날 수 있다는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알아듣는다. 또 어느 쪽에서나 맞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협력과 균형을 갖춘 비행은 이뤄지지 않는다. 왜 이럴까? 실력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 때문이다. 새가 두 날개의 협력과 균형으로 난다는 말을 이해는 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한다. 지적으로는 이해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구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인식하지는 못한 까닭이다. 자기가 처한 한쪽 날개의 입장을 주장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 좌우 날개의 협력을 말한 것뿐이다. 협력과 균형이라는 상위의 어젠다가 하위의 ‘좌’나 ‘우’를 지배해야 하는데, 하위의 ‘좌’나 ‘우’가 상위의 어젠다를 치받는 형국이다. 시선이 높아 실력이 있으면 상위의 어젠다로 하위의 기능을 지배하고, 시선이 낮아 실력이 없으면 하위의 기능에만 집중하다가 상위의 어젠다를 도외시한다. 새의 균형 잡힌 비행을 목적으로 하면 좌우의 치열한 대립이 상호 협력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좌나 우가 처한 진영의 입장만을 목표로 하면 새의 비행은 이뤄지지 못한다. 시선이 좌나 우의 입장에 닿아 있는 한, 새의 비행은 그리 급하거나 중요한 일로 다뤄질 수 없다. 강한 왼쪽 날개와 또 그만큼 강한 오른쪽 날개를 가졌지만, 새는 날지 못한다.

    부부도 가끔 싸운다. 어떤 부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도 싸운다. 길가에서 싸우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는 것 같으면 바로 싸움을 멈추기도 하지만, 싸움을 멈추지 않고 누가 보든 말든 계속하는 부부도 있다. 누가 볼 때 싸움을 멈추는 부부가 시선이 높을까, 아니면 계속하는 부부가 시선이 높을까. 싸움에 대한 몰입도나 충성도 혹은 치열함은 싸움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부부가 훨씬 높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운용하는 격이나 높이에서 본다면, 싸움을 멈추는 부부가 높다. 시선이 높으면 삶을 운용하는 실력도 좋다.

    둘이 싸우는 풍경에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더해지는 일은 생소한 한 사람이 더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전혀 다른 풍경화로 바뀌는 일이다. 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면, 하고 있는 싸움이 세계 전체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싸움을 멈출 이유가 없다. 싸움을 멈추는 일은 오히려 진실하지 않은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높은 시선으로 무장한 실력을 갖춘 부부에게는 싸움을 멈추는 것이 진실이고, 시선이 높지 않은 부부에게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진실이다.

    어느 집에서 고양이를 샀다고 치자. 그러면 거실 풍경에 고양이 하나만 더 그려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고양이를 중심으로 가족 관계가 새롭게 정비돼 전혀 다른 가족이 된다. 거실에서 TV를 치우면, 거실 풍경에서 단지 TV 한 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TV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권력관계나 시간을 쓰는 내용도 함께 사라져서 새로운 가정, 새로운 가족으로 바뀐다. 전혀 다른 새 풍경화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인문적 통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문적 통찰의 높이까지 사유 능력이 고양돼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일이 전혀 다른 풍경화를 펼치는 사건이므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런 통찰의 높이에 도달해 있지 않으면 싸움 풍경에 그저 모르는 한 사람이 더해져 있는 것 이상이 아니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싸움을 해나간다. 결국은 부부싸움 이상의 높이를 가지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의 문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가정의 명예나 평판 등과 같이 한 단계 더 높은 지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싸움을 멈출 수 있다. 지향점이 새의 비행에 닿아 있다면 좌우의 두 날갯짓은 협력과 균형으로 진화할 것이지만, 수준이나 실력이 좌우의 각 진영에 갇혀 있다면 비행의 완수보다 좌우의 싸움에 더 몰입할 것이다. 부부싸움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더 높은 시선에서 아래 단계의 기능을 통제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일이다.

    한국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협치를 말하지만, 협치는 아직까지 난망이다. 굳이 어느 편의 책임이라고 할 필요 없다. 우리의 실력이다. 새가 좌우 날개의 균형을 맞춰 비상하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실력이다. 이 실력이 없는 상태라면 각각의 날개가 각자의 방향성과 작용력으로 분리돼 날지 못하는데, 실력을 발휘하려면 각각의 날개가 자기 정당성과 고집을 줄이고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만 가능해진다. 이것을 우리는 각성이라고 한다. 이 각성을 가진 대립면의 충돌은 성숙과 진화를 보장하고, 미성숙된 대립은 분열과 비효율만 쌓는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다. 결국은 성숙과 실력이다.

    실력의 내용은 무엇인가. 유연성이다. 유연성은 자기 각성과 반성을 통해서 상대에게 양보함으로써 내 이익을 더 크게 실현시킬 수 있는 실력이다. 실력이 없으면 견강해지고 극단화된다. 오른쪽 날개가 높은 시선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자기 날갯짓의 강도와 방향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 날개와 함께 펼치는 판의 형편을 잘 살펴서 새가 날 수 있도록 조정해 ‘정도’를 맞춘다. ‘정도’를 살펴 자신의 날갯짓을 새의 비상이라는 과업에 공헌시키고, 자신의 성취를 이룬다. 왼쪽 날개도 실력이 있다면 이와 다르지 않다. 서로 날개가 붙어있는 방향만 다르지 ‘정도’를 살피는 실력으로 협력해 새의 비상이라는 과업을 완수한다. 극단화되면 이론과 이념과 개념에 집착하고, 유연해지면 현실을 살펴서 정도를 잘 가늠할 수 있다. 최저임금제만 봐도 그렇다. 나라의 규모를 보거나 발전 방향을 보더라도 최저임금제를 실시하는 것은 시대에 맞는 일이다. 실력이 없으면 개념에 집착해 극단화된다. 그래서 최저임금제라는 이슈가 등장하자마자 바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뉜다. 최저임금의 정도를 살피는 숙고는 사라지고, 반대 방향으로 누가 더 극단화하는가의 게임으로 변질된다. 최저임금을 하되 정도를 살펴 너무 과격하게 하지 말자고 하면 반대파로 매도하고, 최저임금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누가 더 세게 할 수 있는가를 가지고만 논쟁한다. 그 결과로 최저임금제를 주장했던 장하성 실장 스스로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과해서 놀랐다는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실력은 이론이나 이념의 주장에 있지 않고, 개념의 순수한 적용에도 있지 않다. 잡다하고 변화무쌍한 현실과 대화해 ‘정도’를 잘 살필 수 있는 데에 있다. 누가 더 강하고 질 좋은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가는 의미 없다. 교과서를 가진 사람의 ‘정도’ 가늠 능력만이 의미 있다. 각성과 반성은 ‘정도’를 살펴 유연한 탄성을 가지게 하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모든 학문의 목적은 ‘정도’를 살피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있지, 이론 그대로 적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에 있지 않다.

    ‘4대강’도 사실 ‘정도’를 살피는 데에 실패한 정책이다. 앞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이나 홍수는 작지 않은 문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물 부족국가임에도 빗물을 가뒤두는 저수 능력은 매우 낮다. 이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 선재적인 -이미 많이 늦었지만- 대응을 해야 할 근본 문제다. 한꺼번에 다 처리하려는 과격함보다 ‘정도’를 살펴 하나하나 조금씩 해나가는 유연성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렇게 된 연유도 ‘4대강’이라는 이슈가 나오자마자 ‘정도’를 살피는 숙고 대신에 찬성과 반대로만 극단화된 것과 관련이 깊다. 누가 정권을 잡든지 아직까지는 ‘정도’를 살피는 성숙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 없다.

    그래서 노자가 이념이나 개념에 매몰된 지식인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뜻대로만 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使夫智者不敢爲也”『도덕경』3장)고 일갈한 것이다. 공자라고 다르지 않다. 공자도 각성 없이 자신의 뜻만 옳다고 여기며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고집부리는 일을 끊자(“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論語·子罕』)고 한다. 그런데 끊자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성하자고 해서 각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시선으로 인도되는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좌우의 날개가 아무리 협력하려고 해도 안 된다. 오직 한길. 자신의 진영을 넘어선 상위의 시선을 갖추고, 그 시선에 의해 인도돼 새의 비상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자신의 일로 삼을 때만 가능하다. 매우 높은 단계의 인격이다. 상위의 어젠다가 하위의 기능들에 의해 흔들리면 안 된다. 하위의 기능들이 상위의 어젠다에 의해 이끌리고 통제돼야 한다. 새의 비상이나 나라의 비상이 다 같은 일이다. 부부싸움도 다르지 않다. 인생이 원래 다 그렇다.

    (건명원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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