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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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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쓴소리 단소리- 정둘시(수필가)

  • 기사입력 : 2018-08-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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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의 없이 지내는 거래처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편안한 사이라 자리에 앉은 채 무심코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분이 나에게 물었다. 혹시 남편과 싸웠느냐고. 자기가 듣기에는 나의 말투가 퉁명스럽기 짝이 없어 상대방은 기분이 몹시 나빠졌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양 정신이 혼미해졌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조금 전의 내 말투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결코 상냥하지 못한 말본새임은 확실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란 것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도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과묵한 건지 무뚝뚝한 건지 구별이 힘든 사람과 삼십 년을 살다 보니 점점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그래도 집안에서 두 사람이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은 없다며 둘러대었다.

    이 무슨 어이없는 반응인가. 듣는 사람이 옳지 않은 것 같다며 충고를 해 주었고, 내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서도 수긍이나 반성은커녕 목 언저리까지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꼭 저렇게 남의 일을 얘기해야 하나.’ ‘한 삼십 년쯤 되면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사는 거지.’ 무안함과 더불어 불쾌감으로 머릿속은 한참이나 술렁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식 헛웃음이 났다. 나이 쉰을 넘기면서부터 제대로 나이 먹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둔 몇 가지가 떠올라서였다. 그중 하나가 ‘나이가 들수록 남의 충고를 부드럽게 받아들이기’가 아니었던가. 세상살이를 어찌 옳게만 살 수 있으랴. 그릇된 나를 바로 세워줄 쓴소리를 향해 귀 하나쯤 열어두리라 다짐했건만, 벌써 마음과 행동이 따로 작동하고 만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나의 허물 정도야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의 파문으로 그치겠지만,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진정성 있는 충고를 수용하지 못하면 그 해악이 뭇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그들의 판단이나 명령이 미치는 영역 안의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주기도 하고 손해를 끼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의 진심 어린 충고를 외면하다 줄지어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던가. 겉으로는 인품이 훌륭한 듯 보여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철옹성 같은 아집에 갇혀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종종 만나게 된다. 한두 번이야 충고든 간청이든 해 보겠지만 그조차 소용없다면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즉, 단 소리만 좋아하다가 외로움을 자초하여 결국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제대로 늙어 간다는 것이다. 또한 소통에 막힘이 없으니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수시로 추스르지 않으면 쓴소리를 듣는 귀는 쉬이 막혀버린다. 듣지 않고 말하는 자는 외딴섬으로 가는 배에서 홀로 노 젓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밝은 거울이 내 얼굴의 흠을 비추면 보는 대로 반드시 고쳐야 하는 법이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떠올리며, ‘음, 음’ 가녀린 목소리가 나오도록 목청을 가다듬어 본다. ‘전화, 이제부터 걸려오기만 해봐라.’

    정 둘 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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