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약통을 엎어 조선콩 아니 쥐눈이콩보다 작은 수천 개의 알약을 쏟았다.
온 방 안에 흩어진 짜증과 낭패
머리와 가슴 그리고 입에 가득한 원망과 자책의 단어들이 날개를 단다.
아내는 말없이 빗자루로 쓸고 손으로 줍더니 얼마 안 돼 약통을 다시 채운다.
돌아보더니 소이불언(笑而不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쓸어 담으면 되었다.
어제 자퇴한 재구를 데리러 가야겠다.
☞ 장마철 ‘불쾌지수’ 하면 떠오르는 이 시는, 실수로 엎어진 환약통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짜증과 낭패’에 대응하는 아내의 ‘笑而不言’ 행위 즉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쓸어 담으면 되었다.’ 이미지에다 ‘어제 자퇴한 재구를 데리러 가야겠다.’ 이미지와 접속시켜서, 독자로 하여금 직접 겪은 듯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저마다 마음 구석에 밀쳐놓고 있던 ‘재구’를 이해와 포용으로 다시 불러오게 하는 자성의 힘을 발현한다. 이처럼 이 시의 힘은 새로움 추구를 운명이라고 여기는 현대시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반성적 교훈(관념의 옹호)으로 귀결하여 자칫 진부하게 읽힐 수 있는 교훈시의 위험을 생생한 현장감과 진정성으로 밀어내는 데 있는 것 같다. 이 힘의 근원인 ‘笑而不言(웃으며 말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유명한 결구인 ‘왜 사냐건 웃지요’ 이미지와 견줄만 한, 이 시의 멋과 품을 한량없게 하고 있다. 조은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