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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역관 이언진의 시적 재능과 자부심- 변종현(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 기사입력 : 2018-06-2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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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역관으로 통신사 행렬에 참여했던 이언진(1740∼1766)은 자신의 신분과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줬다.

    1763년에 통신사 조엄이 일본에 가게 됐는데, 이언진은 통신사 행렬에 왜통사(倭通使: 일본어 통역관)로 다녀온 뒤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대부분 중인 집안의 가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언진의 집안 역시 대대로 역관 노릇을 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그도 사역원에서 치르는 역과에 합격하고 자연스럽게 역관이 돼 왜통사로 일했다.

    하지만 남달리 총명했던 이언진은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 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시적 재능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에는 시인 자신의 내적 고뇌가 잘 표현돼 있는데, 다음 시에도 그의 인간적 깊은 고뇌가 잘 함축돼 있다.



    어리석은 자도 썩고 총명한 자도 썩으니

    흙은 아무 아무개를 가리지 않는구나

    하찮은 책 약간의 저서가

    천년 뒤의 나를 증거하리라



    기구와 승구에서는 어리석은 자도 썩고 총명한 자도 썩으니, 흙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다고 했다. 자신은 인정해주는 약간의 저술들이 있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알아줄 날이 있을 것이라 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당대 신분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할 후일을 기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언진은 당대에도 명성을 얻었고, 그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도착했을 때도 그가 글을 잘 쓴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무려 500개나 되는 부채를 내밀면서 시를 써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언진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시를 읊조리면서 붓을 들어서 부채에 적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500개의 부채에 시를 쓰자 일본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천재를 시험해 볼 요량이었는지 또다시 부채 500개를 가지고 와서는 조금 전 썼던 500개의 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이언진은 붓을 들고 아까 썼던 시들을 중얼거리면서 써 나갔다. 부채의 시를 맞춰보던 일본인들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것을 보고는 대경실색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박지원의 ‘우상전(虞裳傳)’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벌떼같이 몰려와 시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한류 열풍이 오늘날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의 스승 이용휴도 만사(輓詞)에서 이언진을 ‘오색의 특별한 새’에 비유하면서 하늘에서 빌려 온 천재라고 칭송했고,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이덕무도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중인이었기에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가 없었고, 3년 뒤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재능은 2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언진이 꿈꾸던 세상은 다양한 사상이 인정되고, 신분과 혈통을 넘어서서 개인의 능력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변종현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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