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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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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윤리 넘어서서 과감하게 덤벼야 큰 인간 된다
철학, 추상적 이론 아닌 치열한 헌신

  • 기사입력 : 2018-06-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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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출간하고 나서 나온 몇 가지 반응들이 나를 상념에 들게 한다. 철학자가 이제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철학과 비슷한 높이에 수학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철학을 추상적 이론으로만 간주해왔다. 철학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수입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이 생산되는 바로 그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거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아귀다툼의 찢어지는 음성들, 긴박한 포옹들, 망연자실한 눈빛들, 바람 소리, 대포 소리가 다 들어있다. 망연자실한 눈빛들 속에서 쓸쓸하지만 강인한 눈빛을 운명처럼 타고난 한 사람이 역사를 책임지려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시선을 화살처럼 써서 철학 이론이 태어난다. 이처럼 철학 생산 과정에는 역사에 대한 치열한 책임성과 헌신이 들어 있다. 우리가 배우는 플라톤, 데카르트, 카를 마르크스, 니체, 공자, 노자, 고봉 기대승, 다산 정약용이 다 이랬다.

    메인이미지
    송필용 作 ‘시선과 야성’

    철학 수입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울퉁불퉁함이 지적 사유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 울퉁불퉁함은 특수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개별적 구체성으로만 있다. 이런 개별적 구체성에서 잡다하고 번잡한 것들이 모두 제거되고 나서 보편 승화의 절차를 거친 다음에 창백하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겨우 남는 것이다. 당연히 철학 수입자들은 창백한 이론을 진실이라고 하지, 울퉁불퉁한 역사와 육체를 진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들은 사유를 사유하려 들지 세계를 사유하려 들지 않는다. 이와 달리 철학 생산자들은 직접 세계를 사유한다. 사유를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을 보편으로 승화하는 일이지, 다른 데서 생산된 창백한 보편을 가져와 그것으로 자신의 울퉁불퉁함을 재단하는 일이 아니다.

    울퉁불퉁함이란 선진국 시민으로 사느냐 후진국 국민으로 사느냐, 독립적으로 사느냐 종속적으로 사느냐, 전략적으로 사느냐 전술적으로 사느냐, 주인으로 사느냐 노예로 사느냐, 영혼의 높이에서 사느냐 그 아래서 사느냐 하는 문제들이 다양한 굴곡을 그린 것이다. 수입된 창백한 이론을 내면화하거나 자세히 따지는 것을 철학 활동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선진국이니 독립이니, 주인이니 종이니 하는 것은 철학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이데아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초인이니, 도(道)이니, 기(氣)이니, 인(仁)이니 하는 것들만 철학이다. 그러다보니 이 땅에서도 주자학을 닮은 것만 철학이라 하고, 동학 같은 자생적 고뇌는 철학으로 치지도 않는 자기 비하가 오히려 당당해지는 지경이다.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기성의 철학 이론으로 삶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살려는 도전보다는 천년이 두 번 이상이나 지난 지금도 공자나 노자처럼 살려 하고, 플라톤이나 니체를 살려내려 한다. 자기도 버리고, 자신의 역사도 버린다. 자기를 플라톤화, 마르크스화, 공자화, 노자화하려 하지, 플라톤 등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철학화하지 못하고, 정해진 철학을 이념화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평가한다. 쉽게 이념이나 신념에 빠진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해서 해결하려는 야성을 잃고,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아 얌전히 실현하려고만 한다. 결국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이 그들의 구세주다. 아직 거칠고 정리 안 된 자신의 현실은 깎여야 할 미숙한 어떤 것일 뿐이다.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은 그들을 매혹시킨다. 그래서 절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그것의 충실한 종이 된다.

    종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지켜야 할 그것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모순적 상황은 내면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그 분열적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 선명성과 불타협의 철저함을 발휘해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기기만을 해낸다. 목에 힘줄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감추지 않으며, 팔뚝을 휘젓고 목소리를 높인다. 타협이 없는 선명성을 내세워 진실한 주체로 드러나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런 종인가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눈 어두운 사람들끼리는 알 수 없다. 눈 밝은 사람은 안다.

    기준을 신념처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을 모두 참과 거짓이나 선과 악으로 따지기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기준에 맞으면 선이고 맞지 않으면 악이다.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기준을 만들거나 기준을 지키는 일을 당연시하고 중요하게 다룬다. 무엇이나 기준을 만들어 윤리적 접근을 하려 한다. 윤리적 행위에 익숙해지면, 열심히 규제를 만든다. 세계가 새로운 유형의 산업으로 재편되는 데에도 온 나라가 규제로 가득 차서 움직이질 못한다. 새로운 세계를 구시대의 규제로 다루고 있다. 바보짓을 하면서도 워낙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윤리적 부담은 전혀 없다.

    4차 산업혁명을 다루는 일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윤리 문제다. 인공지능 때문에 야기되는 직업의 상실 문제도 윤리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다. 선악의 문제를 다뤄야 진실하게 사는 느낌을 갖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당장은 해당 사건의 주도권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윤리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자기 착각이거나 자기 착시다. 우리는 아직 인공지능의 주도권을 갖지 못했다. 로봇도 그렇다. 그것들을 윤리적으로 다룰 수준에 아직 도달해 있지 않다. 구체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나서 윤리가 있다. 주도권을 가진 선진국에서는 다 그렇다. 거친 야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순하고 질서 잡힌 행위가 요청된다. 드론 시장을 윤리(규제)가 필요할 정도로 키워놓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윤리적(규제적)으로 다루다가 드론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윤리적 주도권보다 시장의 주도권이 더 세고 중요하다. 윤리는 시장 성숙 다음의 일이다. 이 말이 나쁜 말로 들리면, 전략적이거나 선도적인 높이를 아직 모르거나 거기에 서본 경험이 없어서다. 선한 규제가 악을 생산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도 지켜야 할 것이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天網恢恢 疏而不漏). 적은 규제가 오히려 제대로 된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장자’ ‘변무’편에 나오는 대목 하나. “곡선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림쇠, 직선을 긋는 먹줄, 네모꼴을 만드는 곱자를 들이대면 본래의 활동성이 손상된다. 밧줄이나 갖풀이나 옻칠로 세상을 꼭 묶거나 고정시키면 세상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한다.”

    여기서 그림쇠, 먹줄, 곱자, 밧줄, 갖풀, 옻칠은 모두 윤리적 신념이나 규제들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신념을 세상에 선제적으로 부가하는 한, 세상의 효율성은 극도로 약화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먼저 가져다 대면 세상 전개가 위축된다. 게다가 윤리 관념이라는 것이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쓰인다. 칼을 의사가 잡으면 생명을 살리고 폭력배가 잡으면 생명을 상하게 하는 예는 너무 단순하다. 윤리 도덕은 선과 악을 임시적으로 나눌 뿐이다. 여기서 정의가 저기서는 불의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하는 선이 결국은 해가 되기도 한다.

    어디선가 강의를 하고 나니 주최자가 청중들에게 내 강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진과 창의와 독립과 모험심 등등을 연결하는 강의를 했다. 주최자는 선진이라는 말이 거슬린 듯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진은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진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꼭 선진국이 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후진국이 차라리 더 가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경제와 군사와 윤리와 도덕은 한 몸이다. 윤리적 기준이나 이념을 가지고 윤리 영역 밖에 자리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한, 스스로 세상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장자’ ‘거협’편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도둑질에도 윤리가 있다.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스럽고, 앞서서 선두에 서서 침입하면 용기가 있다 하고, 나올 때 맨 나중에 나오면 정의롭다 하고, 도둑질에 성공할지 못할지를 아는 것을 지혜롭다 하며, 분배를 공평하게 하면 인간답다고 한다.”

    윤리 도덕을 매개로 해서 성인과 도둑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교차될 뿐이다. 선과 악도 분리되지 않고 교차된다. 장자의 얘기는 다음처럼 이어진다. “성인이 생기면 큰 도둑도 따라 생긴다. 성인이 죽으면 큰 도둑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천하가 평화롭고 무사하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도둑의 우두머리인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꼴이다.”

    성인은 윤리 도덕의 집행자고 사회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주인공이다. 도척은 윤리 도덕의 파괴자로서 사회를 비효율로 몰고 가는 주범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장자는 좀 달리 말한다. 윤리 도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규제가 많고 조밀할수록 선한 기풍과 효율이 커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세상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좁고 비효율적으로 헤매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윤리 강령이나 윤리적 접근 습관에 깊이 빠질 일이 아니다. 윤리도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해야 한다.

    윤리를 지배할 정도로 함량을 키우는 일이 시급하다. 당연히 짐승처럼 과감하게 덤비는 것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실속 있다. 짐승처럼 덤비면 짐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인간이 된다. 너무 인간적이면 자잘한 인간으로 남는다. 과거에 잡히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기 위해 마음속에 야수를 한 마리 키우자.

    (건명원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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