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9월 22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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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21) 통영 ‘하동집’

소설 ‘김약국의 딸들’ 배경
사랑채엔 오래도록 문학·역사·예술이 머물렀네
통영문예계 전설 제옥례 선생이 안주인이던 4대 부잣집 가옥

  • 기사입력 : 2018-04-0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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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 햇살이 따스한 어느 날, 골목길의 파란 나비를 따라 살며시 찾아간 통영 ‘하동집’은 아늑하고 호젓한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멈춰서 있다.

    통영 서피랑의 박경리 문학 동네 한편에 자리한 ‘하동집’은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고향집을 찾아가는 길 같다. 삐죽빼죽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길은 어릴 적 동무들과 숨바꼭질하며 놀던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가는 길에 골목길 담벼락 곳곳에 새겨진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어록과 작품 글은 골목길을 걷는 재미를 더하고, 선생의 삶의 향기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골목마다 정감이 넘쳐 흐른다.

    옛 정취를 찾아 들어간 ‘하동집’은 지금은 문화공간 겸 한옥체험공간 ‘잊음(이즘)’으로 변해 오가는 이들을 반긴다.

    문패에 적힌 ‘이즘’은 평범해 보이지만 하동집의 역사만큼이나 꽤나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하동집’은 2015년 6월 한옥 체험 공간 ‘잊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문화공간 ‘책방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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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통영 ‘하동집’. 지금은 한옥 체험공간 ‘잊음’과 문화공간 ‘책방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102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통영 ‘하동집’.

    시인 유치환·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통영지부 회의장으로 서너 차례 이용되기도 한 역사 깊은 장소이다. 그리고 ‘통영문화예술계의 전설’로 불렸던 제옥례(1915~2015) 선생이 수녀의 생을 포기하고 우여곡절 끝에 박부잣집의 안주인이 되어 10남매를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하동집’은 원래 기와집 4채로 집터를 잡은 ‘ㅁ’자형 전통가옥 구조였다. 통영의 4대 갑부 집으로 불렸을 만큼 부잣집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집터는 제각각 나눠져 팔렸다. 2채는 이미 허물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섰고, 그나마 남은 2채 중 1곳은 불에 타 일부가 새롭게 지어졌다. 현재의 하동집 사랑채 격인 ‘잊음’ 역시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면서 서까래와 대들보, 기와 등은 원형 그대로 살렸지만 부분부분 새롭게 단장했다.

    ‘하동집’의 유래는 통영의 어장 주인이었던 염진사의 큰딸이 하동 갑부집 박씨와 결혼해 그 터를 잡으면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염진사의 딸이 하동집 바깥주인이자 제옥례 선생의 남편인 박희영씨의 할머니이다.

    제옥례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 박형균 통영사 연구회장(80·전 통영충렬사 이사장)은 “해방 때 8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아버지(박희영)는 바이올린을 아주 잘 연주하셨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단 3대밖에 없는 스즈키 수제 바이올린을 소유하고 계셨는데, 쌀 30가마를 주고 사셨다고 하니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며 “이런 이유로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하동집 사랑채를 자주 들락거리며 아버지와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시인 김춘수는 우리 집안과 사돈 간이었기에 우리 집에 자주 왔었다”고 설명했다. 김춘수의 동생 김규수가 하동집 딸인 박정순과 결혼을 하면서 사돈을 맺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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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하동집 옛 모습. ㅁ자형 전통가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나라를 다시 건설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우리 집 사랑채에서 건준 통영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회의를 서너 차례 했다. 하지만 당시 건준위였던 여운형이 사회주의자(건준위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세력과 정치투쟁 내분)로 인식되면서 시작도 못해 보고 와해됐다”며 당시 상황을 그는 찬찬히 설명했다. 이처럼 하동집 사랑채는 통영에서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사랑방’ 역할을 담당했다. 하동집 사랑채에 손님들로 북적이는 날이면 어김없이 제옥례 선생의 통제사 음식이 차려졌다. 제옥례 선생은 음식솜씨가 뛰어났으며, 특히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오는 통제사 음식을 잘 만들었다고 한다.

    박 통영사 연구회장은 “어머니는 음식솜씨가 좋았어. 살아생전 통영음식 전수자들이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좁은 지역에서 먹고살 만하고, 찾는 이에게 정성스레 음식을 대접하니까 문화예술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자주 모였어”라고 말한다. ‘통제사 음식’은 조선시대 1604년부터 1895년 갑오개혁으로 통제영이 폐지되기까지 292년 동안 경상·전라·충청도의 삼도수군을 총괄하던 통제사에게 올리던 전통음식을 말한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통영문화의 거점 하동집 사랑채는 2015년 한옥체험공간 ‘잊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통영의 명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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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체험공간 ‘잊음’ 내부.


    ‘잊음’은 2011년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 배경이자 통영 문화예술의 사랑방인 하동집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치현(48)씨가 매입해 4년 후 한옥체험공간으로 문을 열었고, 각종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찾는 이의 발길이 늘고 있다.

    ‘오롯이 당신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 대문 한쪽에 세워진 간판에 쓰여진 ‘이즘(잊음)’에 대한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아담한 앞마당을 지나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서까래와 대들보가 원형 그대로 드러나고 하얀 벽면이 어우러진 공간은 소박하지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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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까래와 하얀 벽면이 조화롭다.


    한옥체험공간 ‘잊음’은 나름대로 운영규칙이 있다. 작지만 3개의 방과 마루 등 집을 통째로 빌려주는 대신 외부인들이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또 머무는 이도 6명으로 제한해 오롯이 머무는 이들이 집주인이 된다. 이곳은 TV, 라디오, 시계, 달력 등 문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나만의 사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한옥이 주는 고즈넉함에 취해 나 자신을 비워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해 12월 문화공간 ‘책방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잊음 공간의 한 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잊음의 한편에 위치한 책방에는 여행, 예술, 문학, 그림책 등 통영과 관련된 서적과 전문 서적 등 500여권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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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지기 박정하(28)씨는 “책방 문패는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이야기가 있는 책과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름지어졌다”고 이야기한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오전 11시 문을 열고, 오후 6시가 되면 문을 닫는 책방에는 읽고 싶은 책, 선물하고 싶은 책, 책방지기가 읽고 괜찮았던 책들이 진열돼 있고, 손님들이 원할 경우 책을 판매하거나 대신 구매해 주기도 한다. 또한 소설 ‘은어낚시 통신’의 저자 윤대녕씨와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등 유명 작가들의 강연회와 어린이들을 위한 낭독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통영 문화예술의 거점이었던 하동집은 많은 아픔과 사연을 뒤로하고 이제 새로운 문화·체험공간 ‘잊음’으로 거듭나고 있다. 비움과 채움의 의미에 당신의 이야기를 더해 오롯이 당신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 내면의 에너지를 채워 가는 공간으로 ….

    글·사진= 이준희 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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