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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309) 제22화 거상의 나라 69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 기사입력 : 2018-04-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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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는 청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청빈한 삶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비참한 것이다. 김진호가 신문기자 시절 취재한 여공이 ‘돈은 더러운 것이지만 필요한 것이더라’라고 했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청빈한 관리가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이 음식을 갖다가 주어라.”

    태종은 자주 유관에게 음식을 보내주었다.

    “공의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저명한 문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있는 기록이다.

    1409년 유관은 63세가 되었고 길주도안무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쪽의 국경을 지켰다. 그는 군사들을 철저하게 훈련을 시켜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야인들을 격퇴했다. 그의 명성은 만주 일대에 널리 퍼졌다.

    “유관이 이미 노인인데 군사를 거느리고 야인을 격파하니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유관은 그곳에서 미개한 야인들을 교화시키도록 하라.”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하사했다.

    유관은 나이가 들자 벼슬에 물러나 제자들을 가르쳤다.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누구라도 와서 인사를 올리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유관은 학문이 뛰어났기 때문에 태조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어느 때 장맛비가 한 달 넘게 내려 그의 남루한 집에도 비가 샜다. 지붕에서 천장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삼줄기처럼 굵었다.

    유관은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나는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장마를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소.”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부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하자 유관이 웃었다.

    유관은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따라 올리게 했다.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유관은 정승을 지냈으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아 따르는 학도가 매우 많았다. 시향(時享, 일 년에 네 번 지내는 제사)에는 하루 앞서 제자들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냈다.

    그의 집 제삿날에는 제자들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절인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한두 번씩 돌렸다. 그는 78세가 되었을 때 지춘추관사로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를 수정하게 되었다.

    고려사를 수정하는 사국(史局, 관청)이 금륜사(金輪寺)에 설치되어 있었다. 금륜사는 성안에 있었다. 유관이 수사(修史. 역사서를 수정하는 관리)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며 수레나 말을 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와 관자(冠者, 하급 관리)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소탈한 모습에 탄복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 그가 살던 마을을 우산각 마을이라고 불렀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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