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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307) 제22화 거상의 나라 67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프구나’

  • 기사입력 : 2018-03-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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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은 모두 3000원에서 5000원 정도였다. 황학동의 도깨비시장 잔재였으나 옛날만 못했다.

    ‘아직도 이런 옷이 팔리고 있나?’

    기이한 일이었다. 헌옷을 파는 노점상들 앞에 많은 인파가 오가고 있었다.

    김진호는 느릿느릿 노점들을 살폈다. 노점에 쓸 만한 물건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들끓고 있는 것은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은 분명히 많은 발전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김진호는 한국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동묘에서 신설동으로 갔다. 신설동에는 황학동에서 이사 온 풍물시장이 있다. 풍물시장에는 온갖 중고 잡동사니들을 팔고 있다. 2층 건물로 지어져 있어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쇼핑을 하기에 편리했다.

    1층과 2층에는 식당가도 있다. 김진호는 식당에 들어가 파전과 만둣국을 주문하여 식사를 했다.

    ‘같은 중고 물건이라도 여기가 훨씬 낫구나.’

    풍물시장에는 옷가지를 비롯해 갖가지 생활용품, 기호품, 가구, 장난감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팡이도 팔고 있었다. 대부분 중고품이지만 더러 신상품도 있었다. 60, 70년대 물건들이 많아 저절로 눈길이 갔다.

    토요일에는 노점까지 허락하여 전국에서 많은 상인들이 몰려온다. 마침 토요일이라 골목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중고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만물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골목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프구나.’

    김진호는 우산각 공원에서 쉬었다. 우산각 공원은 조선시대 청백리 유관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유관은 1346년생으로 고려 충목왕 2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 호는 하정(夏亭)으로 문화 유씨였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순차적으로 올라 판비서에 이르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참여하여 공신이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가 은퇴하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는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세종이 깜짝 놀라 문상을 하려고 했다.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공식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

    지신사 안숭선이 만류했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유관은 청렴한 관리고 학자인데 어찌 내일로 미루겠는가?”

    세종은 흰 옷과 흰 일산을 준비하여 홍례문 밖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문상하는 의식을 하면서 울었다.

    “유관의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총랑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관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유관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있는 기록으로 운검의 책임까지 맡았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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