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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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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재난을 통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사람속으로] 재난심리 지원 전문가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

  • 기사입력 : 2018-02-0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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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약이다. 병이나 상처를 얻게 됐을 때 지금의 상태보다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서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그리하곤 다시 건강을 되찾아 일상을 꾸려나간다. 때때로 때를 놓쳐 약으로는 몸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순간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살아가며 뜻하지 않게 변고를 겪을 때, 특히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재난으로 소중한 이를 잃고 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겨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도 필시 약은 쓰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찾아온 재난이 삶을 지탱할 힘마저 빼앗아 가는 순간, 이들에게 필요한 약은 무엇일까?

    “I will be with you.(내가 당신과 함께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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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밀양보건소에서 밀양 세종병원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의 심리 치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태안 기름 유출 사고(2007년), 세월호 참사(2014년), 경주 지진(2016년), 포항 지진(2017년), 그리고 47명(8일 기준)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밀양 세종병원 화재까지…. 최근 10년 사이 국내에서 일어난 대규모 국가적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들의 심리 치료를 도맡아 온 이영렬(57·정신과 전문의) 국립부곡병원장. 우리나라 최고의 재난 심리 전문가로 손꼽히는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 그들의 ‘옆을 지켜주는 것’을 ‘잘 듣는’ 약으로 꼽았다. 상담과 치료 이전에 주변의 사랑과 관심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에서다.

    이 원장은 이번 밀양 세종병원 화재 때도 당일인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30분께 밀양에 도착해 계속 현장에 머물며 32명으로 꾸려진 재난심리지원팀을 총괄했다. 그는 팀을 이끌며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상담에 주력했다.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 사무실이라는 마음으로 어디든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화재 피해자들, 최선을 다했지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데서 오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소방대원들, 동료와 직장을 한꺼번에 잃은 병원 관계자 등을 합쳐 지원팀이 찾아간 이들만 400명에 육박한다.

    그는 국가 정신의료기관의 수장이자 각종 재난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정신과 전문의다. 그러나 이번 밀양 세종병원 화재는 그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이번 참사가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생사가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화재로 19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짧은 순간의 극렬한 고통을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는 심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은 화재 자체에 한 번, 화재가 일어난 후 자신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억장이 무너지며 또 한 번 트라우마를 겪었다. 일부는 고인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원치 않은 부검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며 또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연결되는 소도시인 밀양의 시민들 또한 재난이 일어난 데서 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으로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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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심리 지원 전문가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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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심리 지원 전문가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 /김승권 기자/

    이 원장 개인에게도 이번 참사 희생자 중 유일한 의사이자 그의 1년 선배였던 고 민현식 과장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세상 모든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개입을 하지 않으면 트라우마로 인해 삶이 나쁜 방향으로 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분들이 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거나, 또 우울증으로 인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러한 분들을 ‘고위험군’이라 부르는데, 이번 화재 참사의 경우 15~20%가량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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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재난 피해자 빈소에서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국립부곡병원/



    이들이 깊은 절망으로 빠지지 않게 그는 더 부지런히 유족들이 있는 장례식장,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 퇴원한 환자의 집까지 여러 번 찾아가 살뜰히 챙겼다. ‘이들이 어떻게 느낄까’라는 것만 생각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최선의 노력을 했다.

    “죄책감 때문에 뛰어내릴 창문을 찾던 사람이 다소나마 나아진 모습으로 ‘이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보람을 느꼈죠.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 놓여져 삶을 이어가기 힘겨운 사람들에게 ‘악플’로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볼 땐….”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피해자들을 갈고리로 찍는 듯한 그런 사람들이 저에게도 트라우마가 됩니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 이번 화재 피해자들에게 화재 기사를 보지 말라고도 말하고 있다.

    재난 현장의 베테랑으로 통하지만, ‘노련한 외과의사가 혈관을 끊어먹듯’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그 실수가 아픔이 되기도, 거름이 되기도 했다. 국립공주병원장 시절이던 지난 2007년 재난심리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태안에 급파돼 기름유출 사고로 피해를 본 주민들을 마을회관으로 불러모아 위로 대신 우울증 강연처럼 비쳐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화가 난 주민들은 멱살잡이하듯 그를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 그는 본격적으로 재난 심리에 대해 연구를 하고, 외국의 사례 등을 찾으며 우리나라 재난현장과 심리지원을 접목하기 시작했고, 재난 발생 시 정부의 심리 지원을 책임지는 역할이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 됐다. 그런 그의 염원은 일본 효고현 트라우마센터처럼 중앙정부 차원의 재난 상담지원 상설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트라우마의 경우 1년 이상을 추적하고 사례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재난이 터질 때마다 부랴부랴 꾸려 파견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보니 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느꼈기 때문이다. ‘상설 조직 구성을 위해 직접 그동안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멋쩍게 웃어넘겼다. 지난 2014년부터 부곡병원장으로 근무했던 그의 임기는 6개월여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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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재난 피해자 가정에서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국립부곡병원/


    이 원장이 말하는 재난 심리 지원의 방향이자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 원하지 않은 일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을 때 일어나고, 세상 어느 누구도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순 없다. 자신의 명(命)만큼 또한 살아가야 한다. 재난 심리 지원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들이 납득하고 이겨낼 과정 또한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을 이 원장은 조력한다.

    “재난이 인재(人災)일지라도 상당수 재난 피해자들이 의외로 잘못을 용서하고 싶어 하고, 화재 참사 유족들이 최선을 다한 소방관들을 격려하는 것처럼 재난을 통해 이들은 또한 성장하려고도 합니다. 저는 각자 삶의 주인공인 이분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긍정적인 희망으로 연결해 성장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을 하는 연출가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앞으로도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며’ 옆을 지켜줄 것입니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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