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작가칼럼] 구름 뒤에는 언제나 달이 있다- 손상민(극작가)

  • 기사입력 : 2018-02-02 07:00:00
  •   
  • 메인이미지




    요즘 나는 엎어질지 모르는 공연의 대본을 쓰고 있다. 사실은 이 칼럼도 그 문제의 대본을 쓰다가 밀리고 밀려 마감 직전에 몰려서야 쓰는 중이다. 물론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의 모든 글을 마감 직전에 쓴다. 작업기간 중 80% 이상을 구상에 할애하니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게으름 탓이다. 그래서 ‘글장이’가 되기는 글렀는지 모른다.(변명 같지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글쟁이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의뢰받은 대본은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가무악극에 가깝다. 대사보다는 노래와 춤, 퍼포먼스 위주의 극이다. 주어진 3주 남짓한 기간 동안 관련 소재를 공부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최근 가무악극을 찾아보는 데도 여러 날이 걸렸다. 이후에는 줄곧 구성을 위한 공상에 빠져 지냈다. 주부이면서 작가인 나는 설거지하는 동안, 아이와 눈 마주치며 노는 동안 틈틈이 이야기를 짠다.

    일하는 듯 일하지 않는 듯 일하는 것이다! 어찌 됐건 그리하여 캐릭터와 장별 이야기 구성을 마치고 4장까지 열심히 쓰다가 대본작업은 잠시 중단된 상태다.

    예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연출가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소재를 의뢰받아 자료조사를 하고 여러 번 취재를 다녀와서 장장 6개월을 매달려 장편 희곡을 썼지만 공연에 올리지는 못했다. 주최 측의 사정도 있었지만 나 역시 성에 차지 않아 적극적으로 공연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본은 잊혔다.

    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대본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경우 고료는 받지 못한다. 설사 받는다고 해도 4인 가족 기준 두 달 치 최저생계비 정도 될까. 여러 달 고민하고 애써 작업한 것에 비해 크지 않다. 그래서일까. 공연되지 않았을 때 고생한 결과물에 금전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 것에는 아쉬움이 크지 않다. 전적으로 공연을 위한 대본이 공연되지 않을 때의 아쉬움과 비교해서다.

    발화되어야 할 말들이 종이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고 기약 없는 동면(冬眠)에 빠져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더 속이 상한다. 막상 공연에 올라가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불 꺼진 객석에 몸을 숨길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게 될지라도 말이다.

    달아 달아 달아/ 멀리 우는 달아/ 그리움 따라 비추는 달아/ 내 마음 따라 춤추는 달아/ 달아 달아 달아/ 사랑을 이루어 다오/ 달아 달아 달아.

    주인공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 노래 사이에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가사이다. 곡을 붙이면 어떤 노래가 될지 짐짓 궁금하고 한편 기대도 했는데 상연 가능성이 낮아졌다니 지면으로나마 존재를 알린다. 그 밖에 주옥같은 가사(?!)들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마침 마감 전날인 오늘밤은 달이 슈퍼문, 블루문, 블러드문으로 변했다가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이 일어났다. 우리 지역에서는 구름에 가려 쉽사리 관찰하기 힘들었지만 십수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우주쇼다.

    하필이면 달을 소재로 한 노랫말을 쓰는 이즈음에 달이 보이지 않는다니, 결국 안 되는 작품이었던가 푸념도 해본다. 아직 결정된 바는 없다.

    등단을 하면 꽃길일 줄 알았다. 등단을 해도 글쓰기는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작품은 쉽게 기획되고 쉽게 중단된다. 대본은 언제라도 폐기될 위험을 각오하고 써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놓지 못한다. 못다 쓴 대본도 곧 다시 쓸 것이다.

    구름 뒤에는 언제나 달이 있다.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손 상 민

    극작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