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살 펼치듯이 검붉은 물 일렁인다
시름 고인 허벅에도 새 피가 돌아가고,
나는야 스란치마폭 등이 환한 개미 병정
☞ 자연을 마음대로 부리며 만물의 영장 행세를 하던 인간이 갑자기 한 마리 미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시계(視界)를 벗어난 영속하거나 무자비한 자연과 맞닥뜨렸을 때일 것이다.
이 시의 화자도 새해 첫 일출의 좋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일출의 명소를 찾아 갔다가 영겁의 태양 아래 찰나를 사는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다. 시인은 이미 익숙해져 관념화된 이 자각을 단호히 관념 밖으로 밀쳐버리고 ‘나는야 스란치마폭 등이 환한 개미 병정’이라는 이지적이면서도 신선한 이미지로 교체해 놓고 있다.
새해 첫 태양빛으로 박음질한 듯 금박물린 시어들을 가만히 따라가면 / 설국을 떠나가는 마지막 방주라도 기다리는 듯 일제히 동쪽을 응시하고 있는 수많은 검은 눈동자가 있고 / 한겨울 새벽을 견디는 푸르죽죽한 조그만 입술이 있고 / 그 입술을 삐져나온 기도소리와 뽀얀 입김의 뒤엉킴이 있고 / 출렁출렁 새해 첫물을 받아 이고 가는 정수리가 납작한 옛날 아낙이 있고 / 태양과 등을 마주보며 쉼 없이 지상을 헤매고 있는 용, 봉황, 거북무늬스란치마가 너무 화려해서 늘 가난한 당신이 있고 / 비단금박스란치마 질질 끌며 낯선 거리를 홀로 헤매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있고 / ‘스란치마폭 등이 환한 개미 병정’을 읊조리고 있는 초로의 시인이 있고. 조은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