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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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탐독2] (9)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이제니

기자살롱

  • 기사입력 : 2018-01-12 14: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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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침침한 기차간 같은 호프집 문을 열고 그들이 전화로 알려준 '안쪽 자리'를 찾아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물기가 싹 가신 오징어와 땅콩, 수차례 비워냈을 맥주잔이 허름한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널려있었고 두 사람 모두 혀가 반쯤 꼬여 말이 쉬쉬 새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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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눈에 보기에도 속이 허하고 쓰라린 부분이 있을 법한 이 사람들의 호칭은 간단히 말해 김과 박. 김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근례엔 서로 바빠 거의 만나지 못했고, 잊을만하면 나타나 재밌는 술자리를 벌이는 박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만났다. 두 사람은 몇 년 전 어느 식사자리에서 내가 가운데에서 가교가 되어 처음 안면을 텄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르긴 몰라도 이제는 김과 박이 심정적으로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그들이 나로 인해 좋은 친구를 알아본 것 같아 내심 기뻤다.
     
     "야야. 너. 왔냐. 지인짜! 반갑다. 악수 한번 해보자. 새해 복 많이 받어." 거나하게 취한 김이 큰소리로 나를 불러 앉혔고 손발이 재빠른 박이 벨을 눌러 '호가든 한 잔 더!'를 외쳤다. "야. 우리가, 몇시냐, 4시 아니, 5시부터 술을 마셨잖냐." 눈이 한껏 풀린 김이 혀를 꼬고 말했다. "사실 내가 3시부터 먹자고 했는데. 아, 이거 뭐 일이 빨리 마무리가 안 되어 가지고." 박이 거들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이라는 투의 눈빛을 쏘자 박은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조금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뭐 그리 큰일은 아니고. 조사를 좀 받았는데, 후배들 중에 잘 나가는 변호사도 몇 있고. 괜찮다.' '아니, 아니! 내가 다 해결해 주께! 내가!' 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김이 소리를 냅다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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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김과 박은 내 앞에서 온갖 형상과 빛깔을 갖춘 것들, 그래서 유독 주의를 끄는 것들, 때문에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이 홍진紅塵 세상, 삼라만상을 한껏 펼쳐 보이다 결국 '동물의 왕국'에 다다랐다. 인간의 왕국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 '동물의 왕국' 이야기를 꺼낸 건 김이었다. "이봐. 내가 지인짜! 좋아하는 TV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이 있거든. 내가 정말 유심히 본다고. 동물들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그러다 잡아먹히고 그런 모습들을. 그러던 어느 날 말이야, 평소와 다름없이 동물의 왕국을 보고 있는데, 내 내면에서 이런 마음이 샘솟더라고. 아, 나는 이제 이 세상 온갖 미물들까지, 동물 하나하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겠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가능하겠다! 이런 마음이 말이야."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어리둥절한 내 앞에서 박이 다소곳이 손을 모으더니 말했다. "그것은 아주 좋은 마음이야. 좋은 마음이지."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지금 저 헛소리를 박은 알아들었단 말인가.
     
     "그것이 무슨 마음이냐! 이 세상 어떤 인간을 만나도 내가 그 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더라, 이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을 충복忠僕같던 녀석도 오늘아침 갑자기 내 목덜미를 확 물어뜯을 수 있잖어. 아니야? 맞지? 그렇잖아. 그땐 아, 저건 독사의 마음이구나, 하고 이해하고 말이야. 내가 먹으려고 쌓아둔 것을 슬그머니 훔쳐가는 녀석이 있으면 아, 저것은 원숭이의 마음이구나, 하고 또 이해하고 말이야. 동물의 왕국은 말이야, 숨이 붙어있는 채로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 맹수에게 내장을 하나하나 뜯어 먹힐 수 있는 세계거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지인짜! 잔인하고 냉혹해. 그럼에도 내가 그것들에 대해 그런 마음, 이해하고 심지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낼 수 있겠다 싶더라니까." 김이 말을 마치자 박이 오징어를 찢어 김의 입에 디밀었다. "그건 진짜 멋진 마음이야. 정말이야. 그런데 안주 좀 먹고 이야기해."
     
     이제 바통은 박에게 돌아갔다. 박이 오징어를 씹다말고 동물의 왕국에 대해 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은 박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꼬박꼬박 졸기 시작했고, 결국 박이 하는 마지막 말들은 나 혼자 들어야 했다. "나는 말이야. 그 마음에 한 걸음도 아니도 딱 반보만 더했다고 보면 돼.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한번 산다면 무릇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물이 바로 설표雪豹거든! 히말라야 산맥에 사는. 그것들은 신선처럼 고고하게 혼자 하나의 개체로 살아요, 집단으로 안 살고. 정말 멋있어. 그런데 나는 내가 설표라고 생각 안 하지. 나는 내가 잘 닦인 도로도 아니고, 저 비포장도로의 너저분한 흙길을 겨우 줄지어 다니는 개미 비슷한 존재로 생각한다니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살아서 온갖 미물들에게 또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고 말이야." 나는 이번엔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김을 바라봤다. 김이 깨어 있었다면 이 헛소리를 알아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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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의 왕국'을 다시 떠올린 건 며칠 뒤 어느 카페에 앉아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김과 박이 번갈아가며 했던 동물의 왕국 이야기를 꺼냈다. 독사 이야기, 원숭이 이야기, 설표 이야기. 개미 이야기. 유심히 듣고 있던 상대방은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그거 성인聖人들이 가질 법한 마음 아닌가? 성경이나 불경에 말이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런 말씀들이 적혀 있잖아. 그것들의 변주 아닌가?" 전화를 끊고 카페를 나서며 정말 내 주변엔 다들 헛소리하는 인간들만 꽉 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숨이 붙은 채로 내장을 파 먹힐 수 있는 혹독한 세계에 살면서 내 장기를 노리는 맹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설표도 아니고 개미 주제에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밀알이 되겠다니. 게다가 신神은 어디에나 있고, 여러 가지 헛헛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허름한 호프집에 앉아 호가든을 들이키고 오징어를 씹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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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한 가지 빠트린 이야기가 있긴 했다. 호프집을 나와 어둔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중 김과 박은 내게 충고를 하나 남겼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나는 그것을 똑똑히 새겨들었다. 그건 내가 살아야 할 인간의 왕국, 혹은 동물의 왕국에 대해 독사와 원숭이와 설표와 개미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야야. 어차피 여긴 동물의 왕국. 그러니까 너도 동물로 살어. 동물이 하는 짓 다하고 살라고. 맘에 들면 낚아채고 맘에 안 들면 싸우고. 그냥, 네 마음 가는대로 하고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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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는 간다

     
     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
     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
     
     가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발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
     
     코끼리는 간다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이제니/문학과지성사/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2014)/9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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