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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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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강희근

  • 기사입력 : 2018-01-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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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가

    아파트 지붕을 딛고 내려와

    창문을 제 어머니 젖인 양 어루만지더니

    땅바닥으로 흘러내리어, 마침내

    세상을 과일봉지처럼 싸버렸다



    나의 사색도

    나의 연민도

    무슨 흘러내리는 것으로 싸버릴 수 없을까



    무슨, 과일봉지 같은 것으로




    ☞ 안개가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와 눈앞의 세계를 꿀꺽 삼켰다가 슬그머니 내뱉어 놓곤 한다. 현상계에서 어둠 말고 이런 기술을 부리는 존재는 안개뿐인 것 같다. 도시에 안개가 들면 하늘을 찌를 듯 높고 견고하던 건물들은 미꾸라지숙회 집 두부 속에 갇힌 미꾸라지 신세가 돼버린다. 시인은 이 순간을 두고 안개가 ‘마침내/세상을 과일봉지처럼 싸버렸다’고 상상한다. 안개를 ‘무슨 과일봉지 같은 것으로’ 상상하는 순간, 도시 속의 온갖 딱딱하고 뾰족한 것들이 둥글고 향기로운 과일 형상으로 몸을 바꾸는 기적이 일어난다. 시의 힘이다 상상의 힘이다. 불현듯 시인의 상상세계에 걸려 든 안개는 ‘나의 사색도/나의 연민도/무슨 흘러내리는 것으로 싸버릴 수 없을까//무슨, 과일봉지 같은 것’이 돼 시인의 사색과 연민을 감쌀 뿐, 시인의 거대한 내면을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다. 안개(자연)는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 사색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 실존의 거대한 명제를 슬그머니 불러들이고 있는, 읽을수록 여운이 확장되는 이 시를 나는 ‘무슨, 과일봉지 같은 것으로.’ 곱게 싸서 오래오래 보관하고 싶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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