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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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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소백산

시간이 멈춘 설국, 하얀 설렘이 내려앉다

  • 기사입력 : 2018-01-0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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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린 겨울산은 거대한 구름이 털썩 주저앉은 모습이다. 군입대 전 겨울날, 눈이 가득했던 한라산을 올랐었다. 백록담에서 하얗게 얼어붙은 제주도를 마주했다.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절경 앞에 서 있는 시간은 늘 아름답다. 험한 여행은 그런 아름다움을 겪는 행운이 따른다. 꾹꾹 눈 밟으며 걷는 촉감은 진심을 창피해하는 어린애처럼 두근거리게 만든다.

    눈을 밟으려 정상을 향했던 좋은 기억을 다시 좇아, 지난해 새해에 친한 형과 눈 내리는 소백산을 올랐다. 소백산은 단양과 영주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영주에서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올라 해돋이를 보고, 내려와 풍기의 온천을 다녀왔다. 소백산이 있는 영주 풍기부터 안동, 예천 등은 온천이 발달된 고장이다. 2017년 1월 어두운 새벽 4시쯤 겨울 아침을 맞으러 떠났다. 등산로의 입구부터 내리던 눈은 정상에서야 겨우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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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 등산로의 설경.



    방안에 놓여 빗소리를 들으면 차갑고 쓸쓸해지지만, 눈 내리는 창문은 과묵하고 온화해서 가슴이 깨끗이 닦여지는 기분이다. 인디언들은 눈 오는 것을 보고, 밤에 떠다니던 별들이 돌아오는 것이라 했다. 해 뜨기 전, 어두운 새벽에 흩날리는 눈안개는 보라색으로 보여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가을 동안 낙엽으로 퇴색돼 가던 산은 눈을 맞으며 다시 선명한 살결을 드러낸다.

    마른 산의 숲속 깡마른 나뭇가지들은 가련하고 정직하다. 실낱같은 팔뚝 위로 자신이 감당할 만큼만의 눈을 얹고 산다. 멀리서 날아와 불시착하는 눈은 땅을 공평하게 덮어 눕히며, 산봉우리를 다져 수평의 눈길을 낸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설산의 능선에서 눈발은 병든 사람의 마음속처럼 무게도 없이 춤추듯 날아다닌다. 온 촉각에 차가움이 들러붙은 채 산을 오르다보면 전신에 눈송이들이 붙어 누에고치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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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본 겨울 소백산은 적막하고 단정하다. 온몸을 눈옷으로 두껍게 껴입어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정갈했다. 희방사에서 시작해 비로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는 이미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흰 도화지 위로 물감 떨어지듯, 형형색색의 등산복들이 먼저 올라가고 있었다. 소백산 새벽길은 쓸쓸하거나 고독하거나 할 겨를 없이, 정신없이 추위가 불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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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려앉은 소백산.

    순백색 산길에 어울리는 차분한 사색과 고즈넉한 분위기는 없었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눈 속에 푹푹 발을 빠뜨리며 계속 걸어 올랐다. 고개를 푹 숙여 앞사람의 뒷걸음만 따라갔지만 고약한 날씨의 표정이 전부 느껴졌다. 한라산을 오르던 기억은 분명 견딜 만한 추위였다.

    눈이 쌓여 있는 산길과, 눈이 쌓이고 있는 산길의 추위는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소백산은 사계절 뚜렷한 우리나라의 명산이지만, 수영하듯 눈 속을 쏘다니는 북극곰이라도 나올 기세의 추위가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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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출을 본 후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



    너무 추워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걸었다. 오르는 내내 몇 번 미끄러질 위기를 겪었다. 결국 따뜻해지길 포기하고 장갑 낀 손을 홱 빼버리니 어쩐지 추위가 한결 가셨다. 이제 추위도 그만하면 익숙해졌다 싶었다. 정해진 등산로를 벗어나 영화처럼 눈 위를 내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이 내려 쌓이는 중인 설산은 눈에 갇히거나 조난당하기 정말 좋은 조건이다. 평원처럼 펼쳐진 새하얀 들판 아래에는 험준한 산골짜기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 여기며 욕심을 접고 계속 길을 따랐다.

    소백산 자드락길에서는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청소하듯 눈보라가 일었다. 수증기 같은 눈보라로 겨울 등산로는 하얀 여백을 유지하며, 다음 사람에게도 동등한 설렘과 추위를 준다. 그렇게 눈보라는 양털 같은 눈꽃을 골고루 뿌리고 다시 돌아와 코와 귀와 뺨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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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부석사.



    산사태처럼 울컥울컥거리는 콧물도 근근이 버텨내며 꼭대기에 도달했다. 두툼한 외투에서 새빨개진 뺨과 눈만 내놓은 등산객들과 정상에서 새해를 맞았다. 하늘 반대편에 지난해 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로 새로운 해가 돋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임을 분명히 짚어주는 하늘이었다. 우리는 지난해를 정리하면 덧없는 시간들이 떠올라 성의 있게 쓰지 못한 시간을 두고 후회한다. 새해는 결국 덧없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오늘 밤 다시 돌아갈 처지를 가여워하지 않으며 계속 환하게 밝아 왔다.

    하산하는 길에는 아침 햇살이 비쳐 흰 눈이 반짝거리며 배웅했다. 마침 눈이 멎어 설경을 만끽하며 내려올 수 있었다. 풍기 온천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히터로 아직 몸에 붙은 한기를 달랬다. 건물을 보니 그제야 비로소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새벽 동안의 추위를 보상받듯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온천에서 나와 영주 무섬마을과 부석사, 그리고 안동을 끝으로 설산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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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무섬마을 다리.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코스에 한 번쯤 산행을 넣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등산은 누구나 언제든 가능하지만 힘이 든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견디고 지금보다 높은 곳에 오르면 아래서 얻지 못한 성취감이 든다. 산행은 저금통에 동전을 넣는 일이 아닐까. 주머니 속 동전을 가볍게 떨어뜨려 담듯, 걸음을 차곡차곡 무심히 쌓다 보면 꽉 찬 저금통을 가르는,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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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백
    △ 마산 출생·경남대 재학
    △ 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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