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2018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포토그래퍼- 김지원

  • 기사입력 : 2018-01-02 07:00:00
  •   

  • 기태 쪽으로 검지를 세운다. 정수리를 시작으로 함초롬한 머리칼을 먼저 그린다. 둥근 턱과 좁은 어깨를 지난다. 쭉 뻗은 팔과 열 개의 손가락, 일자형 허리와 작은 엉덩이, 몸에서 제일 긴 두 다리까지, 다리 끝에 달린 작고 앙증맞은 발가락까지. 마치 사진을 찍듯 어둡고 은밀한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찍어낸다. 그의 등에 입체적으로 솟은 사마귀도 잊지 않는다. 기태의 등에 솟은 사마귀는 유난히 볼록했고 컸다.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면 뿌리까지 뽑힐 것 같던 그것은 뿌리를 등뼈 깊숙이 내렸는지 결코 뽑히지가 않았다. 피부를 뚫고 나온 나무줄기 같았다. 나무줄기에 붙어 죽은 삭정이 같기도 했다. 기태는 사마귀를 제거하지 않았다.

    “사마귀 말이야. 더 커진 거 아니야?”

    나는 사마귀를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한다.

    “설마.”

    “아니야. 더 커졌어. 점점 커져. 안 불편해?”

    “뭐 그다지. 잘 때 빼곤.”

    기태는 침대에 누우면 등이 결린다고 엄살을 부렸고 종종 사마귀를 만져 달라고 내게 졸랐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마귀가 난 이후로 모든 성감대가 그쪽으로 몰렸어. 사람들과 등만 닿아도 흥분돼. 의자 등받이나 벽이 제일 싫어. 서류 정리로 앉아 있는 날은 말도 마. 비아그라가 따로 없다니까. 그래도 니가 만져줄 때가 제일 좋아.”

    나는 기태의 사마귀를 버튼을 누르듯 누를 때도 있었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듯 두드릴 때도 있었고 홈을 파듯 문지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몸이 다르게 반응한다는 기태의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이제 등에 사마귀가 없는 기태는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등에 사마귀 난 사람 세상에 나 하나뿐일 걸. 그것도 비아그라보다 강한 페니스 발기 기능이 있는 사마귀라면 말이지.”

    기태가 나를 돌아보며 음흉하게 말한다. 나는 그를 향해 희죽 웃는다.

    “사마귀 타령은 그만 하고, 먼저 씻는다.”

    메인이미지

    발가벗은 기태가 욕실로 들어간다. 나는 맥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희부연 눈을 들어 창밖을 본다. 바깥 풍경이 어슴푸레하다. 건너편의 하이마트 로고가 흐릿하다.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다시 보고 또 눈을 비볐다 다시 본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만 보았다가 반대로 보기도 한다. 로고는 선명해지지 않는다. 눈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고 있다. 다시 심드렁하게 침대에 눕는다. 그리 높지 않은 천장엔 벽지의 문양들로 가득하다. 하이마트 로고만큼 흐린 문양들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린다.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은 건 석 달 전이었다. 야경 촬영 차 출사를 나갔을 때 눈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만 가면 보이지 않았다. 잠깐이었다. 찰나를 노리며 피사체를 응시하다 갑자기 피사체가 흐려지기도 했다. 기막힌 장면들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전에도 종종 흐려 보일 때가 있었다. 그때는 단순한 야맹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작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심각해 출사 후 병원을 찾았다.

    공포에 싸인 내게 전문의는 실명까지의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빨리 나빠질 수도 천천히 나빠질 수도 있다며 정기적인 내원을 당부했다.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나는지 아직 밝혀진 원인은 없다. 전문의는 가족력이 없다는 내 말에 아직 가족에게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수 있고 아니면 단독형으로 이상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의 전문의의 실무적인 입술을 떠올린다. 이보다 더한 병명도 요동 없이 환자에게 전달했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기억한다. 감정 한 톨 섞이지 않은 채 버석거리던 그의 음성. 이렇게 되기까지 몇 명의 응급 환자를 거쳤을까. 나는 솔직히 병명에 대한 두려움보다 허아비 같던 의사의 표정에 신경이 곤두섰다.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는 기태를 본다. 스물여덟의 몸, 더 이상 스물여섯의 깡마른 몸은 아니다. 기태가 채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촛농처럼 떨어진다. 아직 몸에 송이송이 맺혀 있는 물기는 관능적이고도 에로틱하게 비친다. 그 모습을 침대에 앉아 지켜보며 침을 삼킨다. 기태는 진열장에서 드라이어를 꺼내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나는 요란한 헤어드라이어 소리에 귀를 후비며 진열장에서 카메라를 꺼낸다. 기태를 향해 셔터를 누른다.

    “미쳤어? 나 아직 옷도 안 입었다구.”

    기태가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못들은 척 셔터만 누른다. 기태가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다가온다. 내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을 지운다.

    메인이미지

    “왜? 안 돼?”

    섭섭하게 묻는 나를 일별하며 기태가 침대에 카메라를 던진다.

    “좀 찍으면 어때서.”

    툴툴거리는 내게 기태의 싸늘한 시선이 멈춘다. 기태는 다시 드라이어를 틀어 머리를 말린다. 나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만 채 하이마트 로고 쪽으로 고개를 튼다. 드라이어 떨어지는 소리에 기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순간 흐려 보이는 기태를 향해 눈을 찌푸린다. 드라이어를 주워 드는 그의 뒤태가 다시 선명해진다. 거울 속 기태와 마주친다. 어쩐지 그의 모습이 뒤틀려 있는 것 같아 자세를 바꾼다. 바꾸고 보아도 여전히 뒤틀린 모습이 자꾸만 신경을 긁는다. 거울 바깥의 모습이 기태일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뒤틀려 있는 거울 속 모습이 진짜 기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때까지 자세를 고친다. 나는 거울에 비친 기태의 모습이 뒤틀려 있듯 그와의 관계가 뒤틀렸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나와 기태의 동거 생활이 일 년을 넘어가던 작년 이맘때였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기태와 나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게이로 몰아갔다. 나는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사진작가로 얼굴이 알려진 후,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아 힘이 들었다. 나는 일 년간의 동거 생활을 끝내기 위해 짐을 챙기고 기태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잠깐 떨어져 있으면서 친구들의 의심을 가라앉히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기태를 설득했다. 우리는 헤어져 있었다. 기태는 내가 미심쩍었는지 헤어진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메시지 내용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전화 좀 받아. 제발 전화 좀 받으라고. 딱 한 번만. 이 새끼야, 너 없이 어떻게 살라고. 부탁이다. 전화 좀 해. 그래,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잘 있어. 잘 있어라. 나는 여관방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가 마음에 걸려 기태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더 하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맥주병과 생활용품들이 널브러져 있는 방 침대에 기태는 모로 누워 있었다. 발부리로 물건들을 걷어내며 기태 쪽으로 걸어갔다. 기태야. 침대에 앉아 기태를 불렀다.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태야. 한 번 더 불렀다. 미동은 없었다. 쫓기듯 둘러업고 병원으로 가면서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기태와 함께 원룸으로 돌아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발끝에 있는 이불을 끌어와 덮어주었다.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피부는 까슬까슬했고 눈빛은 고단해 보였다. 짐 가지고 올게. 바람이 들지 않게 이불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태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기태의 텅 빈 눈이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어쩌자고 너를 떠났던 것일까. 입술을 물며 기태의 흐린 눈을 피했다. 바스라질 것만 같은 기태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목이 멨다.

    “뭐해? 안 씻어?”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는 기태를 뒤로하고 엉거주춤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다.


    와인바의 불빛은 어두우면서도 은밀하다. 와인 빛깔만큼 붉은 조명은 붉은 꽃을 피워 낼 것처럼 탐미적이다. 조명 아래 앉아 있는 기태를 보며 붉은 꽃은 다름 아닌 기태라고 생각한다. 곧 그런 생각과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유치해 피식 웃는다. 기태가 이유도 모른 채 따라 웃는다. 불빛 때문에 분위기는 한층 관능적이다. 사람들이 마시는 와인향이 뒤섞여 향긋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코가 그 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태 앞에 메뉴판을 내려놓고 웨이터가 사라진다.

    “여전하다 여긴.”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목이 잠긴 소리로 말한다.

    “그러게.”

    옆 테이블로 눈길을 던지며 기태가 말한다. 기태가 메뉴판을 몇 번 들추고 내 앞으로 밀어준다. 와인난과 파스타난을 펼쳐놓고 고민하고 있는 나를 부드럽게 쳐다본다.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사인을 보내는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기태의 눈빛을 느끼며 메뉴판을 들고 사라지는 웨이터의 뒤꽁무니를 좇는다. 멀어지는 웨이터가 흐리게 보여 눈을 감았다 뜬다. 웨이터뿐 아니라 주변 모든 사물들이 눈앞에 뭉개져 있다.

    내 눈은 언제쯤 멀게 되는 걸까. 사람마다 다르다는 의사의 말은 뭔가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불편한 말이었다. 구체적이지 않은 날짜는 늘 오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었다. 나는 매일 아침 깰 때 오늘일까, 하고 눈을 떴다. 언제 눈이 멀지 모르니 눈이 멀 때를 기다리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눈은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것 같았고 보이지 않는 것도 꼭 보여야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나는 한쪽 눈을 감고 웨이터를 본다.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손바닥을 펼치고 앞뒤로 바꾸고 흔들고 내리고 올린다. 주먹을 쥐고 눈을 치는 시늉을 한다. 기태의 발이 정강이에 닿는다.

    “뭘 보는데 인상이 그래?”

    기태가 정강이를 지그시 누르며 물어온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딴청을 부린다. 기태가 눈치채서는 안 된다. 기태에게 이런 지적을 받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눈은 갈수록 말썽이다. 나는 천천히 일렁이는 테이블을 보며 머릿속 달력을 넘겨 다음 내원 날짜를 되짚는다. 아직 일주일이 남아 있다.

    “뭘 보냐니까?”

    기태가 나를 향해 되묻는다. 발은 정강이를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나는 기태의 발목을 손아귀로 잡는다. 아랫도리에 발기를 느끼며 목에 맺히는 침을 삼킨다.

    “아냐, 아무것도.”

    “자식, 싱겁긴.”

    웨이터가 내가 주문한 토마토 스파게티와 프랑스산 레드 와인을 내려놓고 간다. 곧 기태가 주문한 크림 스파게티와 칠레산 레드 와인도 내려놓는다. 나는 와인글라스를 들어 입술을 적신다. 기태의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 올리고 천천히 문지르며 나른한 흥분을 느낀다.


    기태를 처음 안던 날이었다. 여름이었고 밖에선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형으로부터 아우팅을 당했다. 식구들과 저녁을 먹던 주말식탁에서 형이 내민 사진 한 장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사진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쳐 내게 오는 동안, 식사 분위기는 엉망으로 망가져 버렸다. 스물다섯 무렵 교제했던 지훈과의 사진이었다. 게이바를 수시로 들락거렸던 지훈의 대시를 받은 날은 내가 처음 게이바를 찾은 날이었다. 지훈은 적극적이었고 표현이 능숙했고 감정에 솔직했다. 그런 지훈에게 끌려 그를 만나기 위해 그곳을 자주 들락거렸다. 사진은 지훈의 친구인 영호가 우리를 몰래 찍어 다음 날 선물인 양 줬던 것이다. 영호는 그즈음 사진에 맛이 들어 어디든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셔터를 누른다고 했다. 사진에서 지훈과 나는 어느 애정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주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은 짙었고 지훈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만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게이바였고 누가 봐도 그저 그런 시시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 사진 뭐냐? 아버지가 물어오기 무섭게 형이 답했다. 게이바잖아요. 게이들만 간다는. 변명할 타이밍은 없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세 사람을 차례로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가방만 챙겨 집을 나왔다. 망설이지 않았다. 빗속을 걸으며 사진에 대해 생각했다. 지훈과 관계를 정리하고도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사진은 내 방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형이 어떻게 그것을 발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진이 여전히 내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정이 상했다. 지훈과의 추억은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지훈은 내게만 적극적이었던 것도 능숙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바보였고 모자랐다.

    가까운 슈퍼마켓에 들러 우산을 하나 샀다. 몸은 젖어 있었고 감정은 다운되어 있었다. 어디를 가야할지 막막했는데 안개처럼 기태가 떠올랐다. 준호와 셋이서 만날 때 오갔던 눈빛과 감정 때문이었다. 기태는 같은 사진학과인 준호의 친구였다. 준호와 만난 자리에 기태가 몇 번 동석했다. 기태와 전화번호 교환 후 처음 걸었던 그때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슈퍼마켓 출입구에 서서 기태에게 전화했다. 빗소리를 삼키며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기태는 버젓이 나라는 걸 알면서도 여보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성마르게 부르는 기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렴풋한 허공만 바라보았다. 휴대전화 속 그의 음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메인이미지

    기태가 가르쳐 준 원룸아파트로 찾아가면서 수많은 상상들과 씨름했다. 그의 아파트에서 오고 갈 대화들이며, 서투르고도 설익은 몸짓들까지.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일들을 상상하며 입술을 물었다. 기태의 원룸은 아파트 사 층 끝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에서 머리와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못한 걸 자책하며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계단을 뚜벅뚜벅 밟아 올랐다. 빗소리에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젖은 신발이 계단과 맞닿는 소리는 다소 거칠게 들렸다. 심장도 거칠게 뛰었다. 기태의 집 앞에서 몇 번이나 숨을 골랐는지, 초인종에 손가락을 대고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젖은 옷의 물기를 몇 번이나 짜고 또 짰는지. 그렇게 이십여 분을 서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기태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젖은 몸을 훑으며 잠깐 서성이다 나를 안았다. 기태의 마른 몸에 젖은 몸이 부딪쳤다.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개의 몸이 뒤엉키며 각자의 자장 속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처음 들어가 보는 기태의 원룸은 작고 아담했다. 십여 평 남짓 공간에는 침대와 비키니 옷장, 텔레비전과 탁자에 놓인 랩톱컴퓨터가 전부였다. 기태가 보일러 전원 버튼을 누르고 욕실을 가리켰다. 너 많이 젖었다. 씻어. 나는 기태를 보았다. 음성도 표정도 부드러웠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수줍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고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젖은 옷을 벗었다. 가파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입을 벌렸다. 물줄기를 입으로 받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목욕 바구니에서 샴푸를 찾아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다 감고도 심장 소리는 멎지 않았다. 서서 소변을 보고 칫솔 통에서 칫솔을 꺼냈다. 몇 번 사용하지 않았는지 칫솔모는 가지런했다. 칫솔질을 하면서 가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지 않았다. 웃음이 나면 웃었고 심장이 뛰면 그런 채로 두었다. 양치를 끝내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허리에 둘러 묶었다. 문 앞에서 몇 번을 서성이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 앞에 트레이닝복 한 벌이 놓여 있을 뿐 기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허전함이 몸을 휘감았다. 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창문 너머 떨어지는 장대비를 보았다. 심장 소리는 멎었고 대신 그 자리에 굵은 빗소리가 틀어 앉았다. 기태가 수없이 두드렸을 컴퓨터 자판으로 눈을 돌렸다. 자판 위를 달리는 기태의 손을 상상하며 가만히 웃었다. 순간 철컹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기태의 시선과 마주쳤다.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미안, 보다시피 가스레인지고 냉장고고 아무것도 없어. 집에서 밥 해먹을 일이 없거든. 너, 따뜻한 거 먹여야 할 거 같아서. 바닥에 앉아 검은 봉지에서 캔커피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며 기태가 말했다.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받으며 검은 봉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태의 것과 색상만 다른 칫솔 하나가 들어 있었다. 칫솔을 쳐다보며 캔커피의 꼭지를 땄다. 옷은 불편하지 않아? 기태가 내 몸을 훑으며 물었다. 아니, 괜찮아. 나는 반바지 바깥으로 드러난 기태의 발목과 정강이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다리는 그가 사온 칫솔의 모처럼 하얗다.
     
     나는 오른손으로 글라스를 들어 와인 향을 맡는다. 왼손으로는 칫솔모처럼 하얀 기태의 발목과 정강이를 만지작거린다. 캔커피를 마시며 훔쳐보았던 발목과 정강이였다. 내 손이 수십 번, 수백 번 스치고 닿았을 자리는 여전히 하얗고 매끄럽다. 콧속으로 스미는 레드 와인의 은은한 향이 손끝에 닿는 정강이의 감촉과 뒤엉켜 몸이 한없이 나른하다. 포도의 속살을 주무르듯 정강이를 주무르는 내 손길에 기태는 야릇한 쾌감을 느끼고 있을까. 프랑스산 와인을 삼키며 포도 속살의 질감을 상상한다.

     “생일 축하해.”
     불쑥 기태가 곰살궂게 말한다. 촉촉하면서도 은밀한 기태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와인글라스를 만지작거린다. 기태가 가방을 뒤져 포장된 작은 용기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 놓는다.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리본 끈을 풀고 포장지를 뜯고 각의 커버를 연다. 반지다. 은이고 장식은 화려하지 않다.

     “오른쪽 게 니 꺼야.”
     나는 마음이 동해 반지를 꺼내 약지에 끼우고 나머지 하나를 그에게 건넨다.
     “맘에 들어?”
     “응.”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더듬는다.
     “근데 너 요즘 어때?”
     분위기를 바꿔 물어오는 기태를 향해 나는 눈을 든다.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아 흐릿한 기태를 보며 묻는다.
     “뭐가?”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기태는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양 직접적이다. 나는 예기치 못한 기태의 질문에 테이블 밑에서 두 손을 꽉 쥔다.
     “무슨 뜻이야?”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기태가 뭐라도 알고 있는 것 같아 정신을 곧추세운다.

     “아니, 그냥, 꼭 그런 거 같아서.”
     “그런 거라니?”
     “뭘 숨기고 있는 것 같애. 특히, 눈 말이야. 너 몇 달 전에 안과 간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꽉 모아 쥔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린다. 기태가 또렷이 눈에 잡힌다.

     “그랬나.”
     나는 말을 흐린다. 사실 오늘 기태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눈이 멀고 있다고. 니 모습이 거대한 환영 같다고. 유령 같다고. 니가 나를 떠나든 말든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요량이었다. 나는 잠깐 그냥 말해버리고 말까 생각한다. 기태가 물어올 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게 좀 덜 충격이진 않을까. 나는 망설인다.
     “별말 안 해? 너 요즘 눈 안 보인단 말 자주 하잖아. 특히 자다가 깨거나 아침에 일어나면 꼭 그래. 자주 울고 또 자주 떨고. 안과에선 뭐라는데?”
     “별말 없었어.”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별말이 없었다고?”

     “없었어.”
     “진짜야?”
     “진짜야.”

     기태는 며칠 전 밤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잠에서 깼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다시 감고 모로 누웠다. 천천히 눈을 떴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없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더듬어 기태를 찾았다. 그의 등에 바짝 달라붙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기태는 귀찮은 듯 내 손을 뜯어내며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더워. 나는 기태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뒤치는 그의 몸에 한사코 달라붙었다. 더워. 기태는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절망적으로 말했다. 나는 기태와는 다른 절망감으로 그의 마른 등을 입술로 더듬었다. 딱딱하게 솟은 사마귀를 찾았다. 발기 기능이 있다는 기태의 말이 원인이었는지는 모른다. 그 순간 기태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막연한 공포심을 뚫고 솟구쳐 나왔는지도. 하얀 등판에 불뚝 솟아있는 자그마한 돌기. 사마귀를 입에 물었을 때 나는 혀를 세워 미친 듯이 돌기를 핥기 시작했다.

    야, 뭐 하자는 거야! 기태가 몸을 비틀어 내게서 빠져나갔다. 나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두 손으로 훔치며 기태가 있을 어딘가를 향해 비통하게 말했다. 나 눈이 안 보여. 뭔 헛소리야. 무신경하게 말하는 기태의 목소리는 발화한다기보다 소멸하는 쪽에 가까웠다. 안 보인다니까. 나는 양손으로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말며 참고 있던 울음을 토해냈다. 뭐야? 왜 그래? 다급하게 일어난 기태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쫓기듯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다. 버튼 소리와 동시에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얼굴을 베개 깊숙이 쑤셔 넣었다. 장난치지 마! 짜증이 묻어 있는 기태의 음성은 차가웠다. 기태는 내 어깨를 쥐고 세게 흔들었다. 나는 얼굴을 베개에 문지르며 모로 누워 무릎을 가슴까지 오그려 끌어안았다. 몸은 사정없이 비틀리고 부들부들 떨렸다. 기태는 나를 잡아 바로 눕히고 두 다리로 내 무릎을 끌어내려 짓눌렀다.

    내 두 손도 틀어잡아 가슴에 붙였다. 기태는 내 턱을 강하게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눈 떠. 나는 울음을 토해내며 입술을 물고 얼굴을 구겼다. 새끼야, 떠 보라니까! 내 턱을 잡고 양쪽으로 몰아치며 기태의 같은 말이 몇 번 반복되었다.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뜨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찢어놓을 듯 덤벼들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기태가 닦아냈다. 떠 봐. 기태의 음성은 다시 소멸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부들거리며 눈을 떴다. 보였다. 기진맥진 나를 내려 보고 있는 기태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기태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거칠고 탁하고 매운 눈물이 누선을 뚫고 흘러 나왔다. 웃음이 나와? 너 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다. 파랗게 질린 기태의 얼굴은 좀체 복원되지 않았다. 기태는 그대로 쓰러져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기태 가까이 머리를 가져다 대고 다시 쿡쿡 웃었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쪼그라드는 통증을 느꼈다. 백여 군데의 살가죽에서 동시에 불이 붙는 화기를 느끼며 반동으로 격렬하게 몸을 들썩였다. 잠깐의 실명으로 인한 몸의 반응이었다.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몸의 증상에 아까보다 더 큰 공포심을 느꼈다. 기태가 들썩이는 몸을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는 몸의 경련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어느새 눈물은 말라있었다.

     “정말이지?”
     재차 묻는 기태 앞에서 나는 낯익은 긴장감을 느낀다.
     “정말이야.”
     “왜 믿겨지지가 않지. 너 꼭 거짓말 같애.”
     “거짓말 아니야.”

     “뭐든 말해. 숨기는 거, 나 싫어.”
     “알았어. 그런 거 있음 말할게.”
     “나, 너 두 번은 잃지 않아.”
     “알아.”
     “너 같은 애… 처음이야.”

     기태가 테이블 위에 무심히 올려놓은 내 손을 끌어 잡는다. 나는 들끓는 감정에 도리어 기태의 손을 강하게 잡아챈다. 와인바의 분위기와 기태를 향한 욕망 앞에서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집에 가면 춤추자. 근사한 곡으로.”
     기태의 달큰한 눈빛을 보며 나는 그와의 첫 섹스를 떠올린다. 한없이 서툴렀고 어리숙했던 기태와 나를. 기태의 정강이를 훔쳐보며 캔커피를 마셨던 그날, 짙은 고동색 커버로 싼 매트리스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탐했다. 살아 있는 날것의 감정. 서로의 체취를 세포 깊숙이 빨아들이며 서로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섹스 후에 남은 건 그와 나의 체액과 거친 숨소리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울림, 사랑인지 연민인지 동정인지 알 수 없는, 마치 감정들의 혼선 같은.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든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원룸은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흐릿하다. 기태나 나나 불을 켤 생각은 없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 그만이었다. 나는 CD를 고르는 기태 뒤로 천천히 다가가 두 팔로 기태의 허리를 두른다. 몸을 포개면서 눈을 감는다. 취기가 서로의 몸속으로 섞여 들며 노곤했다. 기태는 CD를 고르다 말고 깍지 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는다.

     “우리… 결혼하자.”
     “…….”
     “결혼하자고.”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으며 기태의 등에 얼굴을 묻는다.
     “언약서 같은 거 작성해서 서로 지장 찍어 멋지게 표구하는 거야. 어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동요되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슬러 CD 하나를 꺼낸다. 오 번 트랙에 맞춰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기태가 내 목에 두 팔을 감는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기태가 몸을 움직이며 물어온다. 기태의 리듬을 따라가며 잠긴 소리로 답한다.
     “그래, 그러자.”
     기태의 어깨에 코를 갖다 댄다. 그가 마신 칠레산 레드 와인 향이 짙게 묻어난다. 어깨에 코를 부비며 기태의 목 깊숙이 얼굴을 묻는다. 뜨겁다. 기태의 목도, 내 얼굴도. 내 몸은 기태를 느끼며 뜨겁게 달아오른다. 심장이 뛴다. 심장 소리는 노래의 리듬과 뒤섞여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여름날처럼 사랑스런 내 사랑 그대. 은하수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내 사랑 그대. 귀엽고 사랑스런 내 사랑 그대. 오직 그대만을 향해 내 마음은 두근거리죠. 그대가 내 사람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카페에서 때로는 사람 많은 복잡한 거리에서. 나는 당신 곁에 있었는데 당신은 결코 날 눈치채지 못했죠. 내 사랑 그대여.>

     음악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나는 기태의 그것을 움켜잡는다. 기태가 입을 벌리고 숨을 길게 뱉는다. 기태를 벽에 붙이고 그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댄다. 기태가 내 셔츠를 벗겨낸다. 기태의 손이 내 허리띠를 풀고 팬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기태의 몸에 내 몸을 밀어붙인다. 기태가 내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말한다. 사랑해. 내 입술 위에서 다시 말한다. 사랑해. 기태의 입술이 목을 핥고 내려간다. 아래로, 배를 지나 아래로. 나는 기태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찔러 넣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 벽지의 문양들은 희미하다. 희미해서 어떻게 보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부피를 키웠다가 줄였다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돈다. 어지럽게 돈다. 회오리치며 돈다.
     기태가 내 손목을 잡아끌며 침대로 이끈다. 나는 달아오른 몸과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기태에게서 손목을 빼낸다. 진열장을 열어 카메라를 꺼낸다. 기태가 김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수동 모드인 M 모드에서 셔터속도와 조리개를 맞춘다. 기태를 향해 파인더를 눈에 갖다 댄다. 기태가 깍지를 끼며 머리를 받쳐 눕는다.

     “찍지 마.”
     “오늘만, 딱 하루만.”
     “싫어.”
     “제발. 나만 갖고 있을게. 어디에도 올리지 않아. 블로그, 사이트, 어디에도. 내일 삭제하면 되잖아.”
     나는 기태 옆에 누워 그의 목에 입술을 바짝 갖다 붙인다.

     “부탁이야.”
     기태의 온도는 전혀 식지 않았다. 기태가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만이야.”
     단단한 그의 등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킨다. 나는 기태의 셔츠를 벗기고 바지와 사각팬티도 벗긴다. 사진기를 들고 뒤로 물러서서 기태를 향해 카메라를 든다. 기태는 사진기 앞에는 익숙지 않아 몹시 멋쩍어 한다. 어떻게 할지 몰라 그 자리에서 머뭇댄다. 나는 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고 프레임 안에 기태를 담는다. 기태는 흐리고 아득하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마치 부유하는 기태를 향해 무작정 셔터를 누른다.
     나는 어떤 감정에 셔터를 누르던 손을 멈춘다. 고개를 들지 못해 카메라만 눈에 붙였다 뗀다. 기태가 사각팬티를 주워 입는다.

     “왜 그래? 다 찍은 거야?”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손등으로 얼굴을 훔친다. 살짝 놀란 기태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오지 마.”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목이 잠긴 소리로 말한다.
     “너… 우는 거야?”

     당혹스럽게 쳐다보던 기태가 내 말을 무시하고 곁으로 다가온다. 나는 들고 있던 카메라로 얼굴을 가린다. 기태가 카메라를 빼앗아 바닥에 놓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태는 그저 내 얼굴만 쳐다본다.
     “무슨 일이야? 뭔데 그래?”
     나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기태가 몸을 낮춰 나를 안는다.

     “어디 아픈 거야? 왜 그러냐니까?”
     기태가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내린다. 따뜻하다. 나는 창문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하이마트 로고를 무연히 바라보며 기태를 안는다. 기태를 느낀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