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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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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들리는 말- 문저온(시인)

  • 기사입력 : 2017-12-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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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영화잡지의 ‘올해의 외국영화 베스트5’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덩케르크’, ‘엘르’, ‘토니 에드만’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라이트’를 소개한 글을 읽는 중이었다. 역시나 영화의 아름다운 구절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를 읽고 있는데, 그때는 마침 켜놓은 라디오에서 광고방송을 내보낼 때였다. ‘왕초보오-’ 하는 귀에 익은 광고가 유난히 공기를 때려 울리고,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가 눈과 가슴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둘은 내 안에서 별스런 충돌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둘은 청각과 시각의 서로 다른 감각이었으나, 당연하게도 둘은 말과 글자였으므로, 즉 사람의 언어였으므로, 둘은 결국 내 머릿속 회로에서 만났을 것이다. 만났는데, 왜 날카롭게 부딪쳤을까.

    이런 건 어떤가. 수세대에 걸쳐 영국 사람들은 달래는 듯한 말투로 BBC 라디오 방송에서 매일 네 번 방송하는 해상일기예보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디언’의 한 필자는 말한다.

    “어떤 언어가 해상일기예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운문에 대적할 수 있을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세상의 험악함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아는 침착한 신의 목소리다. ‘헤브리디스제도와 로칼 섬 소식입니다. 서남쪽 해상에는 강도8의 강풍에서 강도10의 폭풍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을 향해 부는 바람은 강도 9의 심한 강풍에서 강도11의 난폭한 폭풍이 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남동쪽 페로제도 소식입니다. 북위7도에 현재 강도9의 심한 강풍이 불고 있는데, 때때로 강도10의 폭풍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합니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평온한 목소리로 격렬한 난폭함을 묘사하는 한 편의 시다.” (‘아주, 기묘한 날씨’)

    말하자면, 들리는 말에 관한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같은 광고가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되고, 대개의 광고들은 듣는 이의 귀를 잡아당기기 위해 큰 소리로 악을 쓰며, 각인되고 잔상을 남기도록 특유의 과장된 억양과 반복구절과 별스런 숫자나 이름들을 ‘호소’한다. 단순 멜로디와 애교는 기본이다. 그리고 세상의 광고는 아주 많다! ‘7*7*대리운전!’이 나오고 곧이어 ‘7*7* 대리운전 제공 시보 12시를 알려드립니다, 띠-’가 나올 때, 문득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도 돈을 주고 30초를 산 어떤 기업의 이름으로 알게 되는구나.

    ‘문라이트’의 구절과 ‘왕초보오-’ 광고가 마치 양쪽 귀를 따로 파고들 듯이 이질감이 들었던 때 나는 문득 즐거운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듣는 윤동주의 ‘서시’, 박지원의 ‘열하일기’.

    오후 세 시에 흘러나오는 김수영의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그리고 이즈음 같은 폭설의 동지에 흘러나오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흰 당나귀 제공 시보 여섯 시를 알려드립니다. 히힝―

    올해의 외국영화 5위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차지했다.

    문저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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