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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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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19) 비밀 간직한 고분(古墳)

무덤 속에서 잠자는 가야 역사
실체 증명할 기록 거의 없지만
1970년대 이후 고분서 유물 쏟아져

  • 기사입력 : 2017-11-2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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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분유물, 가야역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

    가야는 역사적 실체를 증명할 기록이 거의 없다. 역사에서조차 ‘신비의 나라’ 또는 ‘잊혀진 왕국’ 등 설화(說話)에 의존한 작은 왕국 정도로만 취급하며 가볍게 다뤄져 왔다. 또 신라에 귀속된 뒤로는 역사마저 신라에 포함시켜 버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옛 가야지역의 고분(古墳)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로 인해 500년 가야역사는 설화가 아닌 실체로서 한국사의 전면에 등장, 가야역사의 복원을 가능케 했다. 이처럼 가야고분은 가야역사를 자리매김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분은 사람의 매장시설이다. 이 매장시설은 단순히 무덤 자체의 것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념적 형상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분은 봉분의 형태, 봉분의 재료, 유구(遺構)의 재료, 그리고 규모와 위치, 부장유물의 질과 양에 따라 당시의 문화와 역사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분은 당시의 사회 현상들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가야고분은 대체로 낙동강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다.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한 많은 고분이 있는 경북 고령지방, 말이산고분군으로 대표되는 함안지방과 양동리고분 등이 있는 김해지방, 그 외 합천 거창 진주 의령 사천 창원 고성, 경북 성주 등 대부분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지역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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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국 왕족묘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고분군. 100기에 가까운 고분이 있다.



    반면 낙동강 동쪽지방에서는 부산의 복천동과 연산동에 고분군이 있는 부산 동래지방, 당감동 고분군이 있는 부산진구, 비산동 내당동에 고분군이 있는 대구와 경북 달성을 비롯해 창녕 밀양 양산 경산 의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또 최근에 조사된 전라남도 순천과 광양, 전라북도 장수와 남원에서도 가야고분군이 발견돼 가야영역은 일부 전라도 경계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옛 가야지역 가운데서도 대구나 경북 성주와 같은 신라와의 접경지역에서는 문화의 중복현상이 나타나기도 해 그 경계를 명확히 긋기는 어렵다.

    가야고분의 위치 설정은 고구려 신라 백제와 달리 독립된 구릉이나 능선 정상부의 돌출된 곳을 택했다.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고령 지산동, 함안 말이산, 고성 송학동고분군들이다. 이런 고분들의 분구형상은 대부분 원형봉토분이고 전방후원분도 있다.

    내부의 매장 주체시설은 좁고 긴 장방형 석실로서 수혈식과 횡구식이 있고 깬 돌이나 막돌 등 약간 편평한 돌로 쌓았다. 한 분구에는 대개 2기의 석실이 있는데 ‘二’字형 또는 ‘丁’字형으로 배치된다. 어떤 것은 중심 석실 둘레에 수십 기의 소형 석실이 배치된 것도 있다. 이러한 고분에는 시신만을 묻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토기, 철검, 옥제장신구, 금제장신구, 마구 등 다양한 부장물을 묻었다.

    ▲고분군 뒤에는 대부분 산성이 자리 잡아

    6가야의 고도(古都)인 김해 함안 고성 고령 성주 상주 등지에는 거대한 봉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적용되는데, 세력군 또는 생활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고분의 입지는 고구려나 신라의 고분들과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하다. 고분군들이 자리 잡고 있는 지형은 대개 남쪽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는 구릉지대의 산마루와 경사진 기슭이며 구릉 뒤쪽의 높은 산에는 흔히 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함안 말이산고분군의 둘레 산에는 성산산성 (城山山城)이 축조돼 있고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경우도 고분군이 있는 주산의 산정에는 주산성 (主山城)이 있으며 또 그 둘레 산에는 망산산성 (望山山城) 등 가야시대의 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한 고분들의 경우 대개 원형으로 파악됐으나 보통 삼국시대 전까지는 방형분이 정형(定型)이었다. 유물은 널 내부 혹은 널 아래, 덧널과 널 사이 등에 다양하게 부장되어 있는데 대형일 경우에는 따로 부장품(副葬品)을 넣는 덧널(副槨)이 설치되기도 하고 주인공이 살아있을 때에 부리던 시종 등을 순장한 경우도 있다.

    대형고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고 그보다 작은 중형분과 소형분은 산의 경사면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다. 구조를 보면 땅을 파고 그 내부에 할석이나 판석을 이용해 공간을 만들고 이곳에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한 후 여러 장의 판석으로 덮어 밀폐하고 다시 그 위로 봉토를 씌우는 형태이다.

    피장자의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1~2개의 딸린 덧널을 주실(主室) 주위에 배치하기도 하는데 덧널 주위에는 주인공을 위한 무기류 토기류 등 다량의 부장품이 들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가야 최고 지배층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고령 지산동고분군,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합천 옥전고분군 등을 들 수 있다.

    고분은 시기에 따라 사회가 변하듯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변천을 거듭하게 된다. 처음에는 토광묘나 석상묘 혹은 옹관묘의 소형분이 유행하다가 석곽묘로 변한다. 이러한 석곽묘는 중·대형의 석실묘로 변해 갔으며 석실묘는 수혈식석실묘에서 횡구식석실묘로, 횡구식석실묘에서 횡혈식석실묘로 발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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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군에 있는 노출전시관 내부.



    ▲대성동고분군, 가락국 왕족묘로 알려져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지역에서 발굴된 대성동, 구산동, 양동리고분군에서 확인된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목곽묘와 석곽묘, 횡구식과 횡혈식의 석실묘, 옹관묘 등 삼국시대의 여러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던 구조들이다.

    특히 대성동고분군은 구지봉과 수로왕릉 사이의 평지에 위치, 가락국 왕족묘로 알려져 있는데 100기에 가까운 고분군은 목관묘와 목곽묘, 수혈식석곽묘, 횡구식석실묘 등이다.

    가야지역의 고분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 산 13-1에 있는 고아동벽화고분이다. 돌로 쌓아서 만든 묘실 내벽과 천장에 석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천장에 남아있는 연화문을 보면 청색 홍색 녹색 갈색 등의 안료를 써서 아름답고 세련되게 표현돼 있다.

    이것이 과연 가야의 것인지 아니면 가야 멸망 후에 그려진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이 지역이 대가야가 500년간의 역사를 이어간 곳인데다 5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는 가야의 맹주로서 대가야가 자리했던 곳임을 고려하면 고분벽화는 대가야 회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옛 가야지역 고분들은 가야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가야 전체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보고(寶庫)들이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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