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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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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샤를 찾아서] (18) 가락궁궐(駕洛宮闕)

궁궐은 온데간데없고 역사만 잠자고 있다
김해 봉황동·동상동에 왕궁터 추정
봉황동 왕궁지 확인 발굴작업 한창

  • 기사입력 : 2017-11-1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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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조시대에 왕실의 권위와 나라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궁궐이다. 지리적 행정적으로 나라의 중심이 되는 곳에 왕도(王都)를 정하고 왕도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큰 집을 지어 왕이 거처하면서 정사를 펴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궁궐은 나라와 왕실의 상징이었다.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울 때 지금의 김해에 도읍지를 정하고 10대 구형왕(仇衡王)까지 491년간 고구려 신라 백제와 함께 4국 시대를 열어가며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했던 가야의 맏형 가락국. 그러나 김해에는 그 어디에서도 옛 궁궐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가야 500년 역사 가운데 도읍지와 궁궐에 관한 기록은 극히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그것도 건국설화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흔히 고대국가의 도읍지로서 갖춰야 할 4가지 요건으로 성지(城址), 궁지(宮址), 사원지(寺院址), 왕릉(王陵)을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6가야의 옛 도읍지인 가락국의 김해, 아라가야의 함안, 소가야의 고성, 대가야의 고령, 고령가야의 상주, 성산가야의 성주는 이러한 요건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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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조사가 한창인 김해 봉황동 궁허지.



    ▲1500보 둘레 나성(羅城) 궁궐 지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수로왕이 가락국의 왕도를 정하고 왕궁을 건립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서기 42년 3월 15일 수로(首露)는 9간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가락국(大駕洛國)으로, 수도는 김해로 정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세우게 하여 거처하면서 질박(質朴)하고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니 집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제단은 겨우 3척이었다.’

    가락국기는 또 건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수로왕은 즉위한 뒤 수도(首都) 건설과 관제(官制) 확립 및 국력 신장에 나섰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계묘년(癸卯年, 서기 43년) 춘정월(春正月)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도 (京都)를 정하려고 한다.” 이때 임시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묵은 밭을 일궈 새 논으로 경작함. 오늘의 논실)에 가시어 산악(山岳, 五峰七山)을 두루 바라보고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말했다. “이 땅이 여귀풀잎(蓼葉)처럼 좁으나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요.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칠성(七聖:髓身行, 髓法行, 身解, 身至, 身證, 慧解脫, 俱解脫)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이 땅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여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들지어다.” 이에 1500보 둘레의 외역인 나성(羅城)과 궁궐, 전당(殿堂), 관청 및 무기고를 지을 장소를 마련한 후 일이 끝나자 궁궐로 돌아왔다. 널리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 그달 20일에 성곽 일을 시작하니 3월 10일에 이르러 역사(役事)를 일단 끝냈다. 궁궐과 옥사 (屋舍)만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그해 10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갑진년(甲辰年)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으로 옮기고 모든 정사(政事)를 열심히 다스리고 보살폈다.’

    이상은 단편적인 것이나마 역사에 나타난 기록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가야왕국의 궁궐이 어디에 있었으며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김해 봉황동·동상동에 왕궁터

    현재 김해지방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말과 추정되는 궁궐터는 봉황동궁허지(鳳凰洞宮墟址)와 동상동궁허지(東上洞宮墟址) 두 곳이다. 봉황동궁허지는 김해시 봉황동 316 일대에 있는 가락국의 본궁터로 알려진 유적이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가락국 초기 서기 42년 3월부터 44년 2월까지는 지금의 구지봉과 대성동고분군 사이로 추정되는 임시궁궐(假宮)에서 거처하였고, 44년 2월에 새 궁궐(新宮)이 완성되자 이곳으로 옮겨 집정(執政)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새 궁궐 자리가 봉황동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이 제8대 질지왕 때 현재의 동상동에다 다른 궁궐을 지어 옮길 때까지의 가락국 궁궐터로 전해지고 있다. 가락국기에 기록된 새 궁궐의 위치는 임시궁궐의 남쪽 신답평 일대로 되어 있으며 또 김해읍지의 고적(古蹟)조에 기록된 수로왕궁유지(首露王宮遺址)의 위치는 옛 서문밖 호현리(狐峴里)에 있다고 하였다.

    신답평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임시궁궐의 위치가 구지봉과 대성동고분군 사이가 분명하다면 이곳을 임시궁궐의 남쪽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 서문 밖이란 기록이 문제이긴 하지만 호현리는 회현리(會峴里)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지금의 봉황동 일대가 궁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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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사에 있는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 자연석 비표.

    그러나 이곳에는 현재 ‘가락국시조왕궁허(駕洛國始祖王宮墟)’라고 새긴 자연석의 비표(碑標)만 서 있을 뿐 궁궐지로 추정될 만한 다른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은 지금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15년부터 가락국 추정 왕궁지 확인 및 복원 정비와 고증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동상동궁허지는 김해시 동상동 874-9 일대에 있는 가락국의 마지막 궁궐터로 알려진 유적이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봉황동에 있던 초기의 본궁에서 동상동으로 왕궁을 옮겼다고 하며 그때의 내궁(內宮)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궁지의 범위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지금의 연화사라는 사찰과 김해시장 일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설이나 구전 외에는 이곳이 왕궁터임을 증명할 자료는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연화사 정문 안 왼쪽에 있는 석축을 쌓은 낮은 대지 위에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라고 새긴 자연석 비표만 서있다.

    이 비표는 높이 1.9m, 너비 90㎝, 두께 30㎝이며 글씨는 숭록대부판돈영원사(崇祿大夫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가 썼고 가락기원(駕洛紀元) 1887년(서기 1928)에 김문배(金文倍)가 세웠다고 숭선전지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500년 가야역사의 중심이었던 궁궐은 온데간데없고 그 궁지마저 불분명해 왕도의 옛 영화는 김해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개발 붐을 타고 김해 곳곳이 파헤쳐진 데다 무분별한 건축으로 고도(古都)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궁궐터로 추정되는 봉황동 봉황대(鳳凰臺)는 시민들의 체육 휴식공간으로, 동상동궁지는 시장과 사찰, 그리고 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무심한 세월 속에 역사만 잠자고 있다. 훗날 궁궐과 관련된 유물과 기록이라도 발견돼 발굴 여지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남는 옛가야 김해 땅이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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