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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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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세계여행] 카메라에 담은 런던마라톤(3) - 번외편

그녀와 런던서 재회한 날, 슬픈 비가 내렸다

  • 기사입력 : 2017-11-0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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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가 온다. 오랜만에 한 여자를 보러 가는 길. 갑자기 연락이 닿은 L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동안 이국에서의 로맨스를 함께한 사람이었는데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L의 얼굴과 이름만은 너무 선명하다는 점. 그녀를 만나는 일은 내게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았다. 내 생에 얼마 없는 풀지 않은 문제 같았다. 휴대전화에 남은 L과 함께한 밝은 얼굴의 사진 한 장, 기억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몇 안 되는 기억, 그녀의 예쁜 얼굴을 단서로 마치 그때를 돌려놓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듣지 않을 것 같았던 전화 목소리에 머금은 아주 약간의 미소는 내 발걸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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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온 뒤 바닥에 비친 런던 풍경. 오래된 건물들은 그대로 멋스럽다.



    런던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도 비오는 아침이었다. L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그랬다. 나는 아침형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연락을 받고 나가는 날은 유독 일찍 일어났었다. L과의 처음 만나는 날 아침은 맞기 좋은 비가 왔다. 가는 빗줄기는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날리는 정도였고 걸음이 일으키는 바람에 몸을 피해가는 비였다. 나는 런던 거리를 비와 함께 걸었다. 머리에 스며들지 않고 머리카락에 스쳐 흐르는 비였다. 그런 날이 좋았다. 그런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항상 그녀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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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질녘의 빅벤.



    L의 변덕스럽지 않은 점이 좋았다. 변화무쌍함이 섹시함이라 여기는 요즘 여자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화려한 멋은 없었지만 그녀가 가진 것만으로 충분히 내 눈에는 화려해 보였다. 제 눈에 안경이었을까? 있는 그대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그것만큼 필요충분조건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 내가 L에 빠진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내 눈에 그녀는 너무 예뻤기 때문에,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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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카페의 향이 깊고 진한 카페라테 같았다. 그 맛의 비결이 뭔지 내내 레시피가 궁금했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뭔가 모르게 내게 표정으로 말하는 것 같다가도 속을 모를 모습, 말이 많은 여자는 아니었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지 않은 단어들, 길지 않은 문장으로 주고받던 대화는 그래서 더 서로에 집중하게 했다. 이국에서 나누는 모국어, 사랑의 대화. 그러나 서로에 대해 설명하는 말들에조차 화려함은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는 나를 이상형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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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니치에서 바라본 비오는 런던.



    아름다운 무채색의 그림 같은 시간들이었다. 뿌연 연기, 화려한 조명, 색색의 네온 불빛 같은 자극적인 시간들은 담담히 배제되어 검고 하얀 색들의 깊이 차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간. 오래 만나거나 자주 보거나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천천히 그려가는 그림이 흑백으로 그 깊이를 더해갈 때쯤,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때까지만 내가 기억을 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눈 감은 눈꺼풀 안쪽에 사진이라도 박아놓은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L의 얼굴은 미련이라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우리가 왜 ‘헤어짐’에 그토록 초연하게 합의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방조해 버린 것인지. 나는 정말 타국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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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비오는 날 풍경,



    나의 문제이지는 않았을까, 담백하다 못해 과묵한 L의 표현에 내 스스로 조급해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모두 지운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확인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내 미련스레 L을 찾는 노력을 하다가도 일상에 묻혀 금방 또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런던을 떠났으나 어느 날 그녀가 연락이 왔고, 지금 나는 다시 런던으로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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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버스정류장



    영원한 미제로 남겨놓고 싶지 않았던 L과의 시간, 미스터리를 더 이상 미스터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각오만큼 숨이 차는 발걸음, 억울함도 있었을 터, 캐묻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내 기억 속과 시간이 제법 흐른 뒤인 것에 비해 똑같은 모습의 그녀가 앉아 있다. 내가 차마 그 자리로 가기 전에 무심하지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안녕이라는 인사를 걸어오는 L,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렸던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묻는다. ‘또다시 없어져 버릴 거야?’ 그러곤 오지 않을 것 같은 걸음의 방향과 시간 앞에 못 들은 체 웃는 그녀의 예쁜 얼굴만이 내 앞에 있었다.

    사실은 처음 받은 전화 속 목소리 그 미소 하나만으로 내 마음은 이미 이곳에 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알고 싶던 것들이 많았지만 처음 내뱉은 내 말은 결국, ‘그래, 안녕,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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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센트럴라인 끝자락,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마일엔드에 자리한 로핑 카페.



    다른 날처럼 그날도 비가 내렸다. 비는 흩날렸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연애 스토리가 아니다. 분명히 여행이야기, 누군가의 런던을 다시 간 날, 그날의 이야기다. 구질구질한 사랑이야기 따위는 평생 어디에도 써본 적이 없다. 거꾸로 세세히 이 글을 다시 본다면 이 글은 내가 런던에 다시 도착한 다음 날의 첫 아침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요즈음 바쁜 일상에 가을맞이 번외편으로 써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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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강(리버맨)

    △1983년 마산 출생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창원대 사회복지대학원 재학중

    △카페 '버스텀 이노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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