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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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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16) 가야철기(伽倻鐵器)

철기문화 꽃피운 ‘철의 왕국’ 가야
철제무기·농기구 등 대량생산
강력한 군사력과 벼농사 발달

  • 기사입력 : 2017-10-3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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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기·농기구 다량출토 철의 왕국 입증

    가야는 철(鐵)의 왕국이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옛 가야지역은 철의 대량생산으로 고대 가야국이 국가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바로 철 생산 때문이었다.

    가야 제국(諸國)은 다만 6개로 분할된 작은 왕국으로 난립해 통일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고도의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신라, 백제를 비롯한 낙랑, 중국대륙 등과도 긴밀한 교류를 이룰 만큼 큰 세력이었음은 각종 유물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 한문화(漢文化)의 영향으로 한반도에 철기문화의 보급이 가속화돼 본격적으로 철이 사용됐다. 이는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茶戶里) 1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중국제 거울(前漢鏡)과 판상철부(板狀鐵斧)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삼한사회에서 가야로의 발전을 전제로 할 때, 가야초기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는 변한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철을 매개로 중국의 군현(郡縣)인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한 (馬韓), 예(東濊), 왜(倭) 등과 교역하였음이 보인다. ‘위지 동이전’ 변진조(弁辰條)에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뤄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서도 공급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돈의 역할을 한 것은 판상철부(板狀鐵斧)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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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가야땅 곳곳에서 발굴된 덩이쇠, 망치, 도끼 등 각종 철기.



    판상철부는 이름 그대로 그저 편평한 장방형의 쇳덩이로 한쪽에는 날이 세워져 있다. 창원 다호리 1호분의 판상철부 출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체가 도끼와 같은 공구로도 사용했지만 각종 철기를 만들기 위한 원자재, 즉 철괴였다. 이 판상철부는 소유 여부에 따라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실력과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됐다. 이처럼 철기문화가 발달했음은 덧널 무덤에서 출토되는 많은 양의 철제유물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가야는 철제무기의 대량생산으로 강병(强兵)을 만들었고 농사에 우수한 철제 농기구가 이용될 만큼 철기문화(鐵器文化)가 발달했다. 가락국의 다른 이름인 금관가야(金冠伽倻)는 곧 쇠나라(鐵國)라는 뜻이며 수로왕은 김해철산을 지배해 철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가야의 고분에서 철로 만든 농기구들과 철정들이 다량으로 출토돼 변한으로부터 이어받은 철 생산과 교역의 전통을 실감하게 한다. 가야지역에서는 이미 변한시대부터 철을 대량생산해 이웃지역에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낙랑과 대방,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수출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전통이 가야에서는 더욱 활성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제조술 뛰어나 일본까지 전수

    김해지방에서는 철제도구와 왕망전(王莽錢) 등의 화폐와 함께 탄화미(炭化米)가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철제도구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로왕이 왕도건설에서 신답평(新畓坪)에 궁궐이나 성곽을 신축할 때 농한기를 이용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벼농사 등 농업이 주된 생업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가야의 철장으로는 가락국의 김해철산, 대가야의 야로철산(冶爐鐵山:합천군 야로면), 황산철산(黃山鐵山), 척지산철산(尺旨山鐵山:산청군), 모대리(毛臺里) 사철광(沙鐵鑛) 등이 있었다고 한다. 아라가야 주위에는 대곡철산(大谷鐵山), 창원철산(昌原鐵山)이 있었고 소가야의 고성(固城)에는 천성철산이 철기문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야의 철기 제조기술은 매우 발달해 처음에는 섭씨 1000도 전후의 화력으로 연철을 만들고 단련시켜 단철(鍛鐵)로 만들었지만 그 뒤에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초강법(炒鋼法)을 써 대량생산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철모 철부 철정 철판 등이 부산 복천동 유적에서 대량으로 발굴됐다. 부산 오륜대에서 나온 주철제품인 철부는 전형적인 백주철조직(白鑄鐵組織)으로 완전한 용융상태에서 주조됐으므로 초강제조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가야시대의 제철기술 발전의 핵심으로서 용강(熔鋼)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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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 유적지에서 삼한시대와 가야시대의 철기문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사진은 지난 2010년 다호리유적지에서 관계자들이 발굴현장을 살펴보는 모습./경남신문DB/



    ▲철 생산으로 벼농사 발달

    철기의 사용은 벼농사를 크게 발달시킨다. 벼농사는 철로 만든 농기구를 갖는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한국에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것은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가 철기문화의 벼농사를 전달했다. 철기는 무기로도 우수했다. 지난 1969년 부산 복천동 고분 발굴을 시작으로 김해 대성동, 창원 다호리 고분발굴 등 20여 개 발굴팀이 가야고분 발굴을 시도해 왔으며 거기서 철제갑옷 등의 무기류와 각종 우수한 생활용구 등 가야지방 철기문화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많은 유물들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철갑옷은 대부분 가야땅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출토된 가야 철갑옷은 모두 70여 점으로 갑옷과 투구, 목가리개, 팔가리개 등으로 무장한 가야 기마전사들의 늠름한 모습은 상상만 해도 높은 기상을 읽게 한다. 김해시 한림면 퇴래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4세기경의 철판갑옷(국립김해박물관 소장)은 가야인들이 얼마나 철을 잘 다루었는가를 말해준다. 경북 고령군 지산동32호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어깨가리개(短甲及肩甲), 투구도 가야시대의 찬란했던 철기문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어용 무구(武具)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주로 가야고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 외 아라가야의 본거지였던 함안군 가야읍의 함안군청 뒤 말이산 34호 고분에서 출토된 말띠드리개와 각종 철기 그리고 창녕 교동1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길이가 각각 63cm 85cm 크기인 고리자루칼, 말방울, 말띠꾸미개, 재갈, 각종 철기, 교동89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5∼5.8cm 크기의 쇠살촉, 쇠창, 말종방울, 가래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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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투구, 쇠갑옷, 비늘갑옷.



    ▲강력한 군사력 부국(富國) 추측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고분군(良洞里古墳群)에서 발굴된 각종 철기 및 청동기 등은 가야인과 그 문화의 계통 파악은 물론 고대 이 시기 왜(倭)로의 문물전수도 이곳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가야시대 유물 552점 가운데 소용돌이형 무늬장식 환두대도(環頭大刀) 1점과 이형(異形)철촉 3점은 가야철기문화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4세기 중반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환두대도는 길이 56cm 환두부직경 6㎝ 크기이며 환두부의 소용돌이형 무늬장식은 가야의 상징적 문양(文樣)으로 추정된다. 또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을 통해 당시 가락국은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부(富)를 축적하여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성장했음이 확인됐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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