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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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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13) 가야금(伽倻琴)

가야금 만든 가야국 출신 우륵 ‘우리나라 3대 악성’
가야금은 고조선 ‘북’과 중국 ‘쟁’ 바탕 제작
가야 흔적을 확실히 보여주는 ‘민족악기’

  • 기사입력 : 2017-10-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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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 가야 한 곡조여

    이산(耳山)에 줄을 걸어 백결(百結)의

    방아타령과

    극종(克宗)의 평조(平調)가락을 타네

    금곡(琴谷)에 올라가 길게 탄식하나니

    고국은 아득한데 노래 가락만 남았구나

    이 악기의 훌륭함을 찬미하고

    그 이름이 유구(悠久)함을 회상하노라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于勒)이 태어난 옛 대가야의 수도 경북 고령 지방에 전해오는 가야금 12곡 가운데 맨 첫 곡의 노래 내용이다. 가야금은 고조선시대의 북(鼓)과 중국의 쟁(箏)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악기 60여종 가운데 거문고 비파와 함께 삼현(三絃)으로 불리는 가장 오래된 현악기다.

    이러한 가야금은 가야 500년 역사가 대부분 설화에 의존한 사실(史實)들인 데 비해 가야의 확실한 흔적을 말해주는 민족악기로서 1500여년의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야금이라 함은 한자화된 명칭이고 옛 문헌의 한글표기는 언제나 ‘가얏고’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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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타며 망국의 한(恨)을 달랬다는 충주시 대문산의 탄금대.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기

    가야금의 기원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와 잡지(雜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가야금은 중국의 쟁(箏)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가야의 가실왕(嘉實王 또는 嘉悉王)이 12개월의 율려(律呂)를 본받아 12현금(絃琴)을 만들고 이에 성열현(省熱懸) 사람인 우륵을 시켜 12곡을 짓게 하였다. 그후 우륵은 국운이 기울자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 제자 이문(尼文)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갔다. 진흥왕은 우륵을 받아들여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편안히 거처하게 하고 대내마(大奈麻:신라의 벼슬, 位階는 10등) 법지(法知), 계고(階古)와 대사(12등 벼슬) 만덕(萬德)을 보내어 그 업(業)을 전수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를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당시 가야국에서는 음악이 성행하여 왕궁에 전속 악사를 두고 있었다. 우륵은 음악을 좋아한 가실왕을 가까이 모시던 악사였다. 우륵이 세 사람에게 가야악을 전수함으로써 신라의 대악서(大樂署)에 정식 편입되고 신라 삼현(三絃)의 하나가 되어 길이 민족음악으로서 1000여년의 기나긴 전통을 자랑하게 되었다.

    우륵의 가야금은 머지않아 온 나라에 퍼졌고 마침내 일본에까지 전해져 신라금이라 불리었다. 오늘날 우륵은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옥보고(玉寶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우륵의 출생지와 생몰(生沒)연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다만 그는 원래 가야국의 성열현 사람이었다는 것이 삼국사기 등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우륵이 태어난 가야국이 어느 나라 가야인지, 또한 가실왕은 가야국 중 어느 나라 몇대 왕인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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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금을 만든 정정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의 우륵기념탑.

    ▲가야에 널리 퍼진 가야금 12곡

    우륵이 가야에 있을 때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는 12곡을 만들었다. 그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伎)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상기물(上奇物)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등이다. 이 중에서 보기, 사자기, 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郡懸) 이름과 같아서 해당 지방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2곡은 당시의 지명(地名)을 전하고 있는데 하가라도는 남가야 혹은 가락국이라고 하는 지금의 김해지방의 음곡을 말하고 상가라도는 대가야라고 하는 지금의 고령지방의 음곡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우륵이 만든 12곡은 대부분이 지명으로서 당시 지명을 악곡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각 지역 가야소국들의 문화가 생성되었고 12곡 자체가 향토색이 짙은 가야의 지방속악(地方俗樂)이었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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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륵기념탑 옆에 있는 우륵 선생 영정각.

    ▲탄금대서 망국의 한 달래


    가실왕은 지금의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에서 우륵과 함께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내곡리를 가야금의 여음(餘音)인 ‘정정정’ 소리가 난다 하여 정정골, 가야금을 만든 골짜기라 하여 금곡(琴谷)이라고도 한다.

    당시 우륵의 명성은 신라에까지 떨치고 있었다. 신라가 가야를 정복한 후 진흥왕 12년 3월 죽령 이북 고구려 땅을 공략하기 위해 충주에 이르렀을 때 우륵의 소문을 들은 진흥왕은 낭성(娘城)에 살던 그를 불러 하림궁(河臨宮)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였다.

    고국을 망하게 한, 정복자의 진영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당시 우륵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륵은 줄을 고르고 가야금을 뜯을 때마다 신라에 의탁해 멀리 충주지방에 와 있는 가야의 백성들과 함께 향수에 젖어 눈물짓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진흥왕 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져 그 곡수가 185곡에 이르렀다. 가야금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궁정과 민간에서 크게 번창했다. 우륵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전설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고령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삼국사기에는 우륵을 성열현(省熱懸:지금의 합천) 사람이라고 적고 있으나 고령지방의 전설에는 대가야읍 쾌빈리의 속칭 ‘정정골’이라는 유래를 감안할 때 우륵은 이곳 고령 출신이라는 것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충주의 탄금대(彈琴臺)는 우륵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충주가 우리나라 중심지라 생각한다. 고구려 때는 나라의 들(野)이라 하여 국원성이라 했고 신라 때는 다섯 서울 중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중원경이라 불렀다.

    충주시 중심지에서 북서쪽으로 4km, 문경새재에서 발원한 달천(達川)이 남한강과 만나는 삼각주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인 대문산 (大門山) 일대는 가야인의 아름다움과 심오한 한국의 풍류가 15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다. 지금은 지방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충주 사람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지만 이곳은 우륵이 만년에 우거지로 삼고 산상대석(山上臺石)에 앉아 가야금을 타며 떠나온 가야를 그리워했다는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대문산에는 탄금정(彈琴亭)이란 정자와 우륵선생유적비,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우륵이 살던 집이나 무덤 등의 유적은 찾을 길이 없으나 충주지방에서는 매년 10월 우륵의 넋을 기리고 가야금의 영원한 가락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우륵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가야 사람인 우륵이 1500여년 전에 이미 중원문화에 씨를 뿌린 결과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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