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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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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장법의 견해는 달라도 효심은 같더라

  • 기사입력 : 2017-09-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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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부친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移葬)한 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지난 주말에 현충원에 안치된 부친을 뵙고 나서 매번 하던 대로 최규하 전 대통령 묘역을 시작으로 장군, 애국지사, 장교와 사병묘역을 둘러봤다. 참고 삼아 말하면 사병과 대령까지의 묘역 면적은 3.3㎡(1평)이며 장군과 애국지사는 26.4㎡(8평), 대통령은 264.4㎡(80평) 정도 된다. 2005년까지 사병과 위관급 이상의 묘역 면적은 같았지만, 비석과 상석의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었으며 2006년부터는 비석의 가로 세로의 길이를 30㎝×76㎝, 상석의 길이를 55㎝×72㎝로 통일시켰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장군과 애국지사의 향후 매장 예정 수는 각각 대략 100여 기로 면적이 소진되고 나면 사병부터 장군 및 애국지사까지 모두 화장(火葬)해서 3.3㎡의 면적에 안치한다고 한다. 필자는 그동안 나라를 사랑한 ‘마음의 무게’는 같은데도 ‘사병과 장군 묘역의 면적에 대한 차별화’를 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해왔다. 조만간 ‘차별화’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 왔다.

    1598년(선조31) 임진왜란이 끝나갈 즈음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사천시 용현면에 위치한 선진리성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싸움 도중에 아군 진영에서 탄약상자가 폭발해 전열이 흐트러지자 성안에 주둔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조·명 연합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게 돼 후퇴를 했다. 일본군은 전사한 시체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내고 시체의 목을 베어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조선·명나라군의 무덤인 ‘조·명군총(朝·明軍塚)’이다. ‘조·명군총’의 사방은 트였지만, 무덤 뒤와 옆은 곡장(曲墻·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두르고 앞은 사당(祠堂)을 세워 바람과 흉살을 막으며 숭고한 정신을 기리니 이곳이 ‘명당’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최근 사천시 모처의 ‘묏자리’에 대한 감정 의뢰가 있었다. 미리 정한 자리를 감결(勘決·잘 조사해 결정함)하기에 앞서 주산(묏자리의 뒷산)의 용맥(龍脈·능선)을 확인해보니 ‘좌우요동’을 치는 생룡(生龍)이었으며 토질은 잔돌이 많이 박혀 있지도 않고 고랑도 없는 단정한 형상의 견고한 흙이었다. 이를 가리켜 ‘견토인강, 약토인유(堅土人强, 弱土人柔·땅이 강하면 후손이 강하고, 땅이 약하면 후손도 약하다)’라 한다. 필자가 ‘길지’라고 한 묏자리는 ‘지처은복, 무유거의(止處隱伏, 無有去意·머무는 곳은 차분히 엎드려서 가고자 하는 의사가 없어야 한다)’한 곳이었다. 상석은 ‘대표상석’만 하게 했으며 묘역을 향해 바람이 치는 곳에는 ‘가족묘원’이란 글자를 새긴 ‘표시석’을 둬 흉풍을 막도록 했다. ‘좌향 (坐向·묏자리의 방위)’은 자좌오향 (子坐午向·남향)으로 하여 노적봉(露積峰·쌀가마를 쌓아놓은 것 같다 하여 부귀를 뜻함)을 바라보게 했다.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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