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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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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11) 도시재생 이끄는 ‘에스빠스 리좀’

층층이 채운 예술과 문화 … 낡은 도시가 다시 숨쉰다
1970년대 호황 누리던 마산 창동
기업들 빠져나가며 발길도 끊겨

  • 기사입력 : 2017-09-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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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 오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예술촌 내 복합문화공간 ‘에스빠스 리좀’ 3층의 ‘갤러리 리좀’에서 관람객이 비디오 아티스트 김찬우씨의 ‘쑥가라’를 감상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옛 마산은 1970년대 산업화, 도시화 바람을 일으킨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영향으로 전국 7대 도시로 부상하며 젊은이들과 문화예술인들이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원도심인 창동은 경남의 유행을 선도하는 1번지로 ‘경남의 명동’으로 불릴 만큼 번성해 문화예술과 상권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근로자 3만5000여명에 한일합섬 근로자 1만5000여명 등 5만명가량이 퇴근 후에 창동과 오동동 일대를 찾아 누린 호황기였다.

    건물마다 책방과 다방, 옷집, 레코드 가게와 술집이 꽉꽉 들어찼다. 그중에서도 극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유명배우가 나오는 영화 간판이 극장에 걸리면 영화표를 사려는 줄이 길게 이어지곤 했다. 창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극장은 시민극장으로 1945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1908년 마산포 개항 이후 일본 침탈에 맞서 상권 수호를 위해 만들어진 ‘마산민의소’가 강제 해산된 뒤 청년들의 토론장소나 강연장으로 활용되다 극장으로 쓰이게 됐다. 이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극장은 1990년대 창동에만 시민·연흥·피카디리·중앙·태양·명보·동보극장 등 그 수가 7개나 됐다. 그러다 기업이 빠져나가고 창원권에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발길이 끊기자 1997년 시민극장마저 폐업을 신청했다. 2000년대 중반 대형 영화관인 메가라인이 들어섰다가 경영난을 이유로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으면서 창동은 영화관이 없는 원도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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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합포구 창동예술촌내 복합문화공간 ‘에스빠스 리좀’.

    그러는 사이 창동은 빈 점포가 늘고 찾는 이의 발길이 줄어 쇠잔하고 움츠러든 골목으로 전락했다. 정부와 창원시가 2011년 도시재생 테스트베드 사업을 추진하면서 ‘창동예술촌’으로 변신을 꾀하는데 빈 상가는 예술인의 작업공간으로, 낡은 도로는 색색의 예술의 옷을 입은 문화공간이 됐다. 극장의 빈자리는 여전했다. 그러다 10여 년 만에 창동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지난 2015년 12월 23일 마산 창동예술촌 내 예술영화전용 상영관과 갤러리, 카페, 게스트하우스를 갖춘 공간 ‘에스빠스 리좀’이 탄생했다. 에스빠스는 ‘공간’을, 리좀은 ‘땅속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이 공간이 지닌 역할과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에스빠스 리좀을 설립한 ACC프로젝트협동조합 하효선 대표는 “창동은 많은 사람들의 향수와 추억이 깃든 곳이잖아요. 이곳이 쇠퇴하는 게 속상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창동에 더 오래 머물고 예술촌이 번성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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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빠스 리좀’ 3층의 카페 ‘비스트로 리좀’ 창문은 프랑스 베르사유 미술학교 세골렌 페로 교수의 작품이다.

    층마다 68평 남짓한 공간의 탄생은 녹록지 않았다. 창동 명물 ‘복희집’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1985년쯤 지어졌는데, 예전엔 많은 가게가 입점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010년 즈음 주변 상권의 영향으로 건물엔 1층 ‘멕시코’와 2층 카페가 세 들어 있었고 지하와 3, 4층은 꽤 오랜 시간 비어 있었다. ACC프로젝트협동조합은 2013년 당시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했던 김창수 관장과 김보성 창동상인회장의 제안으로 그 자리에서 도심형, 다원형 레지던스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3층과 4층엔 초빙한 국내외 작가들에게 연습공간과 아틀리에, 거주공간을 제공했다. 이듬해 6월 지하엔 레지던스의 공연장으로 ‘창동SO극장’을 만들었다. 이 레지던스는 국내외 작가를 초빙해 일정기간 환경을 제공하면 작가는 그동안 창작한 결과물을 전시 또는 공연하는 형태의 사업으로 지금까지 12명의 작가가 흔적을 남겼다. 첫해엔 바로크음악을 하는 프랑스 성악가와 피아니스트, 설치미술을 하는 이탈리아 작가, 한국무용을 하는 무용수 등 음악, 미술, 무용,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8명의 예술가가 레지던스에 묵었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회화와 한국무용을 협업하거나 무용수가 그림 앞에서 붓칠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다양한 성과를 냈다. 그러다 2014년 경남도의 지원이 중단되고 이듬해 창원시의 레지던스 사업이 종료됐다. 그러면서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된 소극장 역시 문닫을 위기에 처했다. 레지던스와 소극장을 운영하던 문화단체 ACC프로젝트는 이 공간을 뜯을 수 없어 프랑스문화원으로부터 1년여간 무상으로 지원받은 영화를 틀며 ‘목요영화’를 운영했다. 이때 삼삼오오 관객이 찾는 걸 보고 고심 끝에 직접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 대표는 스스로를 ‘영화광’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 ‘코아양과’ 옆에 살았는데 극장이 가까운 데다 영화를 좋아한 아버지 덕분에 수위가 너무 센 영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영화는 섭렵했단다. 이후 프랑스 유학생활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프랑스 방송국은 오후 8~9시에 드라마 대신 단편영화를 주로 틀어줘요.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영화 주제나 다양한 시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니까 영화를 안 볼 수가 없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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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빠스 리좀’ 4층 게스트하우스 리좀.

    레지던스 작업실로 쓰이던 3층을 갈라 오른쪽은 매표소와 카페인 ‘비스트로 리좀’으로 활용하고 왼쪽은 전시공간인 ‘갤러리 리좀’으로 쓰고 있다. 특히 비스트로 리좀에 있는 창문이 눈에 띄는데 지난해 4월께 레지던스에 묵은 프랑스 베르사유 미술학교 세골렌 페로 교수의 작품이다. 외벽 유리창에 한국 전통 패치워크인 보자기에서 영감을 받아 그 문양으로 색깔을 입힌 조각을 붙인 작품인데 빛이 변할 때마다 창밖의 건물과 어우러진 문양도 다르게 보여 매력적이다. 작가 숙소로 쓰던 4층은 ‘게스트하우스 리좀’이 됐다. 이 공간은 원래 건물 주인댁으로 1980년대 부잣집의 상징인 원목 싱크대와 벽돌 외장재를 그대로 살리고 이층침대와 경첩, 욕실 등 필요한 부분만 손을 봤다. 개발 대신 재생을 지향하는 리좀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소극장은 ‘씨네아트 리좀’으로 예술영화관으로 탈바꿈했는데, 태생이 영화관이 아니어서 생긴 천고가 낮다는 핸디캡은 예술영화라는 장르로 상쇄했다. 시설이 열악하지만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관객들이 먼저 알아봐 줬다. 예술영화전용관 중 가장 많은 편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곳으로 소문난 덕에 전국 예술영화전용관 가운데 흥행성적이 중간쯤은 된단다. 하 대표는 “오늘도 75세 단골 어르신 관객께서 예전 영화관이 떠오른다며 영화 5편을 예매하셨어요”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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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 공간이 ‘늘 새로운 시도가 가능한 곳’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테마영화제를 열고 다른 나라의 영화제와 본격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수상작을 상영하고 여러 나라 배우와 감독이 서로 교류하면 영역을 넓혀갈 수 있어서다. 알록달록한 로고와 공간 내의 유기적인 구성이 보여주듯 창동예술촌과 에스빠스 리좀을 연결해 궁극적으로 지역의 예술가에게 해외로 뻗어나갈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단다.

    하 대표는 “쇠락한 원도심은 도시재생 아니면 개발되기 마련인데, 추억이 가득한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 아닌가요? 추억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마산 원도심에 문화예술적 환경을 조성해 이 복합예술을 기반으로 도심재생을 이룰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공간은 오래도록 묵은 추억에 예술이라는 새 옷을 덧입혀 오늘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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