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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표절과 창작 사이 간격은 1㎝- 황일숙(세무법인 형설 창원지점 대표)

  • 기사입력 : 2017-08-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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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서울에서 대입 재수할 때 일이다. 학원의 국어 선생님이 고려 중기의 천재 시인 정지상의 시에 나오는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비 갠 긴 둑엔 풀빛이 짙어 가는데)’를 썼다. 그리고 그 밑에 이수복 시인의 시 <봄비>의 첫 구절인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를 썼다.

    그리고서 ‘여러분, 이 부분 표절 아닌가요?’하고 물었다. 아니라고 부인하기는 어려웠지만 2연의 푸르른 보리 밭길에서부터 4연의 타오르것다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표절이라고 비난한다면 이에 동의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시에 대해 표절이라고 비난하는 분도 있고 참 좋은 시라고 옹호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에 인용이라는 말만 붙이면 표절이 아니지만 시 가운데 인용을 붙이면 시의 모양이 이상해지지 않을까?

    얼마 전 한 유명한 여류작가가 표절했다고 말들이 많았다. 창작과정 중 필사에 몰두했던 이 작가의 경우 다른 책의 멋있는 구절을 표절하려는 악의를 품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좋으니까 몇 번 웅얼거리다가 머릿속에 저장하였으리라. 여러분들도 책의 글귀나 말 중 멋있다고 여기는 구절은 자기도 모르게 외우려는 경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원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표절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창작과 표절 그 중간쯤에 벤치마킹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표절이라는 말은 도둑질이라는 나쁜 뉘앙스를 주고, 벤치마킹은 타인의 성공이나 시행착오를 보고 자신의 과오를 줄인다는 좋은 뉘앙스를 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표절 없는 창작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둑기사의 경우 선배 기사들의 기보를 외우는 것도 표절일 것이고, 프로야구 선수의 경우 잘하는 선수의 타격폼을 따라 하는 것도 표절일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에 인용이라는 말만 붙이면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이를 크게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 물론 학자들의 경우나 정부 고위관료의 경우에는 매우 무겁게 다뤄야 하겠지만 말이다.

    황일숙 (세무법인 형설 창원지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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